무너진 성城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 없이 올라 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시인은 집에서 시내로 나갈 때 성북동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난 길을 이용해야 했는데 성터가 남아있던 그 길을 오가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터'와 '바위'는 모두 오랜 시간이 담긴 사물이다. 이에 반해 '풀잎'과 '나'는 약한 바람에도 영향을 받는 물리적으로 연약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다음 구절에서 등장하는 '태초의 생명'과 '한떨기 영혼'을 내면에 담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