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무형문화재 제 35 호
조각장 彫刻匠
시대 :
기능보유자 : 김철주(金喆周)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종암동 52-26
지정연월일 : 1970. 7. 22.
금속세공을 담당하던 장인(匠人)의 한 사람의 조각의 기능보유자 김철주(金喆周)가 성북구에 거주한다.
조각장은 금속기의 표면에 평각(平刻)・투각(透刻)・고각(高刻)・육각(肉刻)・상감(象嵌) 등의 기법으로 문양을 새기는 장인으로 조이장(조이장 또는 쪼이장)으로 불리는 것이 더욱 일반적이다.
조각 일은 입사(入絲)와 더불어 청동기시대 이후 우리나라 금속공예 의장 기술의 중심을 이루어 온 대표적인 기술로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칼자루에 조각과 입사기법이 병용된 청동기시대의 환두태도(鐶頭太刀)를 비롯하여 삼국과 통일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금속장신구들은 조각기술의 전통과 우수성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에이다. 조각은 주로 고급기물에 쓰였기 때문에 그 수요층 또한 왕실・귀족 등 특수한 신분을 지닌 계층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조각장은 관아에 소속되어 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은을 다룬다 하여 은장(銀匠)의 명칭으로, 백동장(白銅匠)・적동장(赤銅匠)・생철장(生鐵匠) 등 재료별로 분류된 다른 장인들과 함께 장야소(掌冶所)에 소속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이후에는 기술의 성격에 따라 보다 세분화된 조각장의 명칭으로 공조(工曹)와 선공감(繕工監) 등에 분속되었다. 조선후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공조에 소속되어 있던 장인 수는 55종(種)에 255명인데, 그 중 금속공예 관계는 12종 80명으로 약 3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공장(京工匠) 체제가 붕괴되고, 개화의 추진과정에서 조각기술의 전통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1900년대 초에 경공장의 체제를 일부 계승한 미술품 제작소가 이왕직(李王職)의 직영으로 설립되면서 기술전통을 앞 시기의 수준으로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각장 분양의 첫 기능보유자였던 김정섭(金鼎燮)도 이곳에서 기술을 배양했으며, 현재는 그의 아들 김철주가 새로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동하고 있다.
재료는 백금・금・은・철・연(鉛)・석(錫)・아연・알루미늄 등의 금속을 한 가지나 또는 합금한 것을 소재로 한다. 만들어진 물건의 금속면에 조각을 하는 데는 강쇠로 만들어진 5cm 내외의 자그마한 정(釘)을 쓴다. 정에는 촛정・공군정・다질정・평다질정・비늘정・누깔정・움푹정・운풍정・갈기정이 있고 이밖에 광을 낼 때 쓰이는 광치기와 컴퍼스의 구실을 하는 거름쇠와 소도리, 조이틀 등 갖추어져야 하는 도구만도 수백 점에 이른다.
조이질을 하는 무늬에는 수복문(壽福紋)・초롱문(草籠紋)・편문・당초문(唐草紋)・난간문(欄杆紋)・사군자문(四君子紋)・십장생문(十長生紋)・산수문(山水紋)・화조문(花鳥紋) 등이 있는데 조선말기 이후에는 특히 길상적 상징의미를 지닌 문양이 주류를 이룬다. 개화기 이후에는 서울 종로 광교천변(廣橋川邊)에 은방도가(銀防都家)가 집중해 있어서 금은세공(金銀細工)의 중심이 되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91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본문의 지정연원일은 조각장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된 날을 말하는 것으로 김철주가 조각장으로 인정받은 날과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