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온공주
1822.06.10 - 1844.05.24
인물 개인 기타
조선 시대 왕족이다. 조선 23대 왕 순조의 셋째 딸로, 어머니는 순원왕후이다. 1829년(순조 29)에 덕온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알려져 있다(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딸이 있었으나 정식 공주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다). 1837년(헌종 3)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1844년(헌종 10) 5월 24일 헌종의 계비를 간택하는 행사에 참여했다가 급체로 죽었다. 묘소는 현재의 장위동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덕온공주의 묘 봉표(封標, 봉분을 하고 표를 세움)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사방의 경계표가 서로 명덕동에 이르고, 동으로 장위리(長位里)에 이르며, 남으로는 외백호 산등성마루에, 북으로는 동안평에 이르러 경계가 맞닿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위동
  • 덕온공주 당의(1)
  • 덕온공주 당의(2)
  • 덕온공주 당의(3)
  • 덕온공주 유물
  • 덕온공주 의복(장옷)
  • 덕온공주 의복(삼회장저고리)
  • 덕온공주 의복(누비삼회장저고리)
  • 덕온공주 의복(원삼)
  • 덕온 공주가 남녕위 윤의선에게 하가하다
  • 셋째 공주의 작호를 덕온으로 삼다
  •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아버지 순조의 자경전기
  •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목과 예절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德溫公主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기타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22.06.10 - 1844.05.24
  • 비고: 생몰년은 음력 기준

근거자료 원문

  • 又以禮曹言啓曰, 謹依口傳下敎, 德溫公主新定墓所, 發遣郞廳與戶曹郞廳及中使, 眼同看審, 以壬坐丙向封標, 而四標則西至明德洞, 東至長位里, 南至外白虎山脊, 北至東安坪接界云矣, 敢啓。 傳曰, 知道。
    또 예조의 말로써 아뢰기를 “삼가 구전 하교대로 덕온공주의 묘소를 새로 정하는 일을 낭청과 호조낭청 및 중사(中使)에게 맡겨 보내었습니다. 함께 살펴보고 임좌병향(임방을 등지고 병방을 향한 방향)으로 봉표(封標, 봉분을 하고 표를 세움)하니, 사표(四標)가 서쪽으로 명덕동(明德洞)에 이르고, 동쪽으로 장위리(長位里)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외백호(오른쪽 산줄기) 산등성마루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안평(東安坪)에 이르러 경계가 맞닿게 된다고 한 것을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알겠다”라고 하였다.
  • [상세내용]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년(순조 22)∼1844년(헌종 10). 순조(純祖)의 3녀로 모친은 순원왕후(純元王后)이며, 익종의 누이동생이다. 남령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하였다. 윤의선은 판관(判官) 윤치승(尹致承)의 아들이다. 1829년(순조 29) 덕온공주(德溫公主)로 봉해졌으며 1838년 3월에 윤의선과 혼인하였으며 1844년에 졸서하여 소생은 없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璿源系譜紀略 [집필자] 심량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항목명: 덕온공주(德溫公主)
  • 덕온공주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셋째 딸이다. 동기로는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 명온공주明溫公主(1810~1832), 복온공주福溫公主(1818~1832)가 있지만, 이들은 덕온공주가 혼인하기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순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왕들은 슬하에 여식으로 후궁의 소생인 옹주만을 두었으므로, 덕온공주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공주로 기록된 사람이다. 아버지 순조는 1829년 공주가 8살 되던 해 ‘덕온德溫’이란 작호를 내리고, 공상供上과 전결田結을 예에 따라 마련토록 하였다. 공주나 옹주는 보통 12살을 전후하여 혼인을 하는데 덕온공주가 13살이 되던 해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덕온공주의 가례는 3년상 뒤로 늦춰졌다. 덕온공주의 혼인은 3년 뒤인 1837년에 본격화되었다. 대왕대비는 14살부터 16살까지의 전국의 미혼 남성들에 대한 금혼령을 내리고 부마자를 간택했다. 그리하여 1837년 6월 25일 생원 윤치승의 둘째 아들 윤인갑이 최종 부마자로 확정되었다. 순원왕후는 윤인갑의 신체 조건과 함께 대왕대비 김씨와 인척관계인 가문 조건을 고려하여 부마로 확정하였다. 윤인갑이라는 이름은 부마로 확정된 다음 ‘의선’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순원왕후는 윤의선을 부마로 확정한 뒤 남녕위로 봉작하였다. 1837년 16세의 나이로 1살 어린 윤의선과 가례를 올린 공주는 도성 안 저동(중구 저동1가 · 충무로2가 · 명동1가 · 명동2가 · 을지로2가 · 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에 살림집을 마련했다. 공주의 경우 시가로 들어가지 않고 별도의 살림집을 마련하여 사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자주 병을 앓았으므로, 어머니인 순원왕후는 특별히 공주를 궁에 들어와 치료를 받게 했다. 순원왕후는 일반적인 치료법 외에 민간요법까지 동원하여 공주를 치료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844년 덕온공주는 임신한 몸으로 급체를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7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후사 없이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나서 윤의선은 친형의 둘째 아들 윤용구를 양자로 들였다. 덕온공주의 묘는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범위는 서쪽으로 명덕동, 동쪽으로는 장위리, 남쪽으로는 외백호산 산등성, 북쪽으로는 동안평東安坪과 경계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지도를 보면 서쪽의 명덕동과 동쪽의 장위리가 구별되어 표기되어 있다. 덕온공주의 묘소는 이 두 마을 사이, 지금의 남녕위재사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94-96쪽
  • 윤의선과 덕온공주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장을 찾을 수 없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관찬 사료는 덕온공주의 결혼과 죽음, 윤의선이 역임한 관직 정도만을 알려줄 뿐이다. 그런데 최근 윤의선이 쓴 글씨와 덕온공주가 쓴 한글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들 부부의 학식과 예술적 기량, 생활의 구체적 단편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중략) 덕온공주는 요절했지만, 어려서부터 순원왕후와 궁내 사람들에게 왕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윤의선과 혼인한 뒤에도 서체를 익힌 결과, 여러 편의 한글 편지와 「자경전기」, 「춘련」 등 아름다운 필체의 한글 서예 작품을 남겼다. 덕온공주의 단아하고 기품 있는 궁체 글씨는 당대 한글 서예의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2019년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2019. 4. 25. ~ 8. 18.)에서는 덕온공주가 사람들, 즉 조선왕실과 윤용구, 윤백영 등이 쓴 약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한글 작품들 400여 점이 공개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라는 칭호에 담긴 무게를 실감할 수 있는 전시였다. 한글 작품 외에도 덕온공주가 남기고 간 것들은 많다.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 · 의복 · 유물이 각각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 제211호, 제212호로 지정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앞서 소개한 공주가 남긴 한글 편지나 한글 작품과 마찬가지로 공주의 손녀이자 윤용구의 딸인 사후당 윤백영尹伯榮(1888~1986) 여사가 갈무리해 둔 것들이다. 19세기 전반 왕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꼭 필요한 소중한 자료이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97-100쪽
  • 김성일(지음건축도시연구소 연구원, 이하 김): 윤용구 선생을 조사하다 보니 또 덕온공주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요. 작년에 덕온공주께서 가지고 계셨던 인장이 미국에 경매로 올라왔다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언론에 언급되었어요. 이번에 한글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고, 또 재작년인가 고궁박물관에서도 한번 전시를 했었고요. 덕온공주에 대해서도 조명이 되고 있는데 제가 관련 기사를 보다 보니까 덕온공주의 묘가 장위동에 있다고 많은 기사에서 인용하더라고요. 만약에 공주의 묘가 있다면은 굉장히 중요한 지역 자산인데 그래서 찾아보니까 도저히 공주의 묘가 보이지도 않고. 들여다보다 보니까 50년대 항공사진에 분명히 그 공주의 묘로 추정되는 형태가 있거든요? 지금 이쪽 코너에 ‘김진흥 가옥’이라고 부마 가옥이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이게 무덤으로 볼 수 있거든요? 여기서 거리가 조금 되긴 하는데 집에서 나오셔서 요까지 이 오솔길로 걸어가서 묘를 이렇게 한 번 둘러보시고 오신다던가, 그래서 이 지역은 묘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소나무 울타리 같은 것도 있었고요. 자꾸 주민분들께서도 여기 소나무 울타리가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이 묘가 겹치니까 이장을 한 것 같습니다. 도로 자리가 이 묘 위로 지나가거든요? 유선(윤백영의 손녀, 이하 유): 50년도에는 제가 마지막까지 갔을때 그냥 있었어요. 김: 60년대쯤에 도로가 만들어지는데, 60년대 이 땅이 동방단지라고 하는 이름으로 땅 전체가 넘어가고 개발이 이뤄지면서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니까 길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에 도로가 지나가고 하면서 일단 원래 위치에서는 옮겨진 거 같고, 이쪽에 보시면 덕온공주 묘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도 덕온공주 묘가 있는데 지금 이 묘는 용인 쪽으로 이장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안 되더라고요. 유: 제가 그것 때문에 이번에 한국에 온 거예요. 저희 조부모께서 덕온공주마마 분하고 부친 석촌 윤용구 대감님 묘가 흔적이 없어졌으니까, 그거를 굉장히 애를 태우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박물관에 이번에 오면은 어떻게 하면 찾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 말이죠. 김: 네. 덕온공주님에서부터 윤용구 선생 또 윤백영 여사님 이렇게 3대가 전해오는 문화적인 측면들도 부각이 되어야 하고 또 마지막 조선왕조의 공주라는 부분과 한말 선비의 모습을 지키신 윤용구 선생님이 개별적으로도 조명이 될 필요가 있는데, 또 이 묘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유: 저는 지금 여든이 되어가면서 저에게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실천하고 가고 싶습니다. 제가 장수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저희 조모께서 하도 애를 타셔서. 제 생각에는 제가 제 조모한테 빚을 많이 졌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도와주시니 저는 하늘이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07-110쪽
  • 덕온공주의 삶에 대하여 백: 덕온공주님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데요. 덕온공주께서는 어떻게 사시다 가셨는지 혹시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유: 저희 할머니께서 덕온공주마마를 존경을 하셨어요. 저희 증조부 석촌 대감께서 굉장히 존경을 하셨나봐요. 그분께서 쓰신 글이며 이런 거 해서요. 근데 워낙에… 이분이 한 3세 됐을 적에 벌써 덕온공주 집안에서 모셔가려고 그랬었대요. 양자로. 그 생각을 하셨대요. 친부께서 아드님이 둘이셨거든요? 둘째 아들이 석촌 대감이셨는데요. 근데 어려서부터 이분이 아마 그 능能했었나봐요. 백: 총명하신 그런게… 유: 네. 덕온공주 대신에 유상궁이 계셨었는데 유상궁께서 아마 석촌 대감을 다 기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덕온공주마마의 책자를 다 내놓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될 때까진 그분이 많이 가르치셨대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그런 분들은 이런 글재주를 타고나신 거 같아요. 덕온공주께서 글을 참 좋아하셨대요. 그렇지만 세 공주 분 중에서도 그 분이 마지막까지 사셨으니까. 굉장히 공주보다 오래 사셨으니까. 굉장히 글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순조 왕께서도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대요. 자손은 다 없으셨으니깐 안 그렇겠습니까? 공주는 절대적으로 부마께서 집에 들어오셔서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는 모든 걸 다 예복을 차리고 앉아서 기다리셔야 된대요. 공주에게 주어진 범례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이 양반이 일찍 주무시고 싶어도 그걸 벗을 수가 없잖아요. 머리에 쓰신 것도 많고 정좌를 하고 그러고 남편께서 사랑에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시니까. 한시가 되든 두 시가 되든 세 시가 되든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도 그분이 불이 안 꺼지면 주무시지를 못한대요. 근데 유일하게 그래도 책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책하고 앉아계셔서 그렇지 저기를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백: 그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이렇게 공주라고 조금 다르게 사시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요. 유: 왜냐하면 그 법도가 보통 양반의 사대부보다 더 엄격했답니다. 아버지가 임금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 아니면 오빠가 임금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세도 때문에 아주 공주에 대한 거를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어요.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23-125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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