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설립
삼선 60년의 역사는 학교 연혁지와 사진 및 졸업앨범을 통하여 그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연혁지를 통해 학교 설립의 개괄적인 추진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색이 바랬지만 귀중한 사진자료가 남아 있어 개교 당시의 학교 모습을 볼 수 있음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학교는 1945년 광복 이후 혼란한 가운데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는 시기에 절실히 요청되는 초등교육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1949. 9. 1일에 개교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1949. 1월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는 과정에서 학교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서울 시내의 초등학교에서는 3부제 수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가 광복 이후의 이른 시기에 개교하였음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함께 서울 중심부에 인접해 있는 학교의 위치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한 권영일, 최경하, 장진섭, 이회용, 이만수 등 지역인사들은 1947. 3. 16일에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 이후 다방면으로 활동하여 1949. 8. 15일에 학교 설립이 인가되었고, 동년 8월 25일에 학교 교사 및 운동장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대지는 660㎡(200평)였고, 운동장 넓이는 18,150㎡(5,500평)였다.
그 후 1949. 8. 30일 초대 교장으로서 노태정(盧泰禎) 선생이 취임하였고, 드디어 1949. 9. 1일에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 전교 학급수는 1학년 6학급, 2학년 5학급, 3학년 2학급, 4학년 2학급, 5학년 1학급의 계 16학급이고, 학생수는 1,032명(학급당 평군 64.5명)으로서 학교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학교 교사과 완공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은 인근의 서울돈암초등학교로부터 8개의 교실(교실 7실, 교직원실 1실)을 대여받아 진행하고 있었다.
학교 교사는 1949. 10. 1일 기공식을 거행한 후 건축에 들어가 1950. 2. 20일 연건평 832㎡(252평)의 2층 1개동이 완공되었으며(교실 7실, 교직원실 1실), 드디어 동년 2월 25일 서울돈암초등학교로부터 신축교사로 이전하여 새로운 터전에서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1950. 6. 5일 학급편성 시 학급수는 26학급이었고, 학생수는 1,788명(학급당 평균 68.8명)이었으며, 교직원수는 28명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학교는 1949년 개교 당시의 16학급 1,032명의 학생이 교사 신축 후인 1950. 6. 5일 학급편성 시에는 26학급, 1,788명의 학생수에 이르는 매우 큰 규모의 학교가 되었다.
이 때는 정부가 1950. 6.1일부터 6년제 의무교육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실시함으로써 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워 나라의 발전을 기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시기였다.
그런데 새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 4개월만인 1950. 6. 25일에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1956. 6. 26일 정부는 각급 학교에 휴교를 지시하였고, 우리학교도 동일자로 휴교하였다.
그 후 1950. 9월의 9·28 서울수복으로 1950. 10. 16일 수업을 재개하였고, 1950. 10. 30일 제2대 교장으로서 이지춘(李知春) 선생이 취임하였다.
하지만 1·4후퇴 관계로 1950. 12. 25일 재차 휴교하기에 이르렀고, 다시 수업을 재개한 것은 1952. 7. 1일이었다. 당시의 학급수는 8학급이었고, 학생수는 350명이었으며, 교직원수는 7명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학교는 8·15 광복 이후 이른 시기인 1949. 9. 1일 개교하였으나, 새롭게 마련된 교사에서 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휴교와 수업재개를 거듭하는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우리 학교만이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의 모든 학교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였다.
그 후 1952. 6. 30일 제3대 교장 김운배(金雲培) 선생이 취임하였고, 1953. 4. 25일 제4대 교장 박양수(朴良洙) 선생이 취임하였으며, 학교가 어느 정도 정상을 되찾은 것은 1954년에 이르러서였다.
1954. 4. 5일 학급편성 시 학급수는 34학급이었고, 학생수는 2,112명이었으며(학급당 평균 62.1명), 교직원수는 37명이 되어 6·25전쟁 발발 직전의 규모를 초과하는 수준이 되었고, 교사의 증축을 통해 학교가 점차 안정되고, 교육활동도 활성화되게 되었다.
제6부 삼선교육을 돌아보며/졸업생
한지호 24회(1977) 졸업
누구나 한 번 쯤은 해 보았을 일이지만, 어릴 적에 살던 동네에도 가 보았다. 당시엔 제법 넓어 동네 형들과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할 정도였는데, 아니 이젠 차 한 대가 가까스로 들어갈 정도의 그냥 좁은 골목길이 돼 버린 것이 아닌가.
커서 보면 작게 느껴진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옛날에 작지만 개성 있던 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덩치 큰 다가구주택들만 빽빽이 들어선 탓인 듯하다.
다행히 내가 태어나 살던 집만 계단 옆 축대 위에 세워져서 그런지 유일하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들이 모여 얽히고 섥혀 살던 ‘마을’은 없어진 집들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겨울에는 언 땅에 구멍을 내어 봄들이도 하고, 옹기종기 쪼그려 앉아 달고나도 먹고 뽑기도 하던 공간들을 그저 눈으로 가늠만 할 뿐으로 어쩔 수 없는 아쉬움 속에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삼선초등학교 졸업생의 회고록으로 학교 주변 풍경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며 회상하는 부분이다.
제6부 삼선교육을 돌아보며/졸업생
조필상 30회(1983) 졸업
삼선동은 당시 3동까지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장 등 힘 있는 권력층과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도 있었고, 산동네에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사람도 있었다.
학생들도 그러했다. 당시에 자가용을 타고 등교하는 어린이서부터 도시락을 못 먹던 어린이까지 빈부격차의 생활수준이 다양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학교시설은 비교적 좋았다. 병설유치원도 있었고, 공립학교 최초의 수영장도 만들었다. 여름철에는 인근의 사립학교 어린이들이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석유나 연탄도 아닌 갈탄과 목재를 섞어서 태워 교실난방을 했으며, 3학년까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2부제 수업을 했다.
저렴하게 공급됐던 우유 급식을 먹지 못하던 아이들도 있었고, 1년에 5,400원이었던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삼선초등학교 졸업생의 회고록으로 재학 당시 학생들의 경제 상황 등을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