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1913.02.27 - 1974.07.25
인물 개인 화가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화가이다. 1933년 동경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에서 공부하고, 1937년 귀국 이후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였다. 자연을 통하여 한국적인 감성을 담고자 노력했던 그는 항아리, 달, 별, 학, 구름, 밤하늘 등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소재를 다루었다. 1944년 김향안과 결혼하여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이어받아 자신의 호와 아내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수향산방’이라 이름 붙였다. 1948년 종로구로 이사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집을 마련했다. 그의 수필 「산방기」에는 이곳에서의 생활과 성북동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수향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 수월암 부근이며,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북동
  • 김환기, 생루이 아뜰리에, 1957, 파리
  • 김환기, 성북동 자택,1955
  • 김환기와 김향안, 1957, 파리
  • 김용준, 수화소노인가부좌상, 1947
  • 김향안에게 보내는 김환기 편지, 1955
  • 김환기, 10-VIII-70 #185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 1970
  • 김환기, 삼각산, 1954
  • 김환기, 자화상, 1955
  • 김환기, 집, 1956
  • 김환기_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표지
  • 현대문학 창간호 표지(삼성출판박물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煥基
  • 이명칭: 수화(樹話)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13.02.27 - 1974.07.25
  • 비고: 생일은 음력 기준

주소

  • 주소: 02838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74-1 (성북로 168)
  • 비고: 수향산방, 성북동 32-1(김환기·김향안 가옥)

근거자료 원문

  • 1944년 5월 1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현 YMCA)에서 고희동의 주례, 정지용·길진섭을 청첩인으로 김환기와 김향안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1944년 결혼한 김환기는 김향안과 함께 살 신혼집을 구할 때 김용준과 상의를 하고 마침 이사를 하려던 그의 집을 사게 된다. 김환기가 성북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김용준 덕분이었다. 근원 김용준은 김환기가 김향안과 결혼하기로 했다 하니 자신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을 헐값에 넘겨 주었다. “집은 구했나?” “아닙니다. 선생님 아직 거기까지는” “그럼 노시산방으로 올 생각은 없나?” “선생님이 계시는 노시산방에요?” 김환기는 무슨 사연이 있기에 집을 팔려고 하나 싶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노시산방은 김환기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마당이 넓어 감나무 뿐만 아니라 화초가 많았다. -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충렬 1944년 결혼, 성북동 32-3, 근원(近園)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 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 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 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 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 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김향안 김용준과 김환기 역시 각별한 인연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이경성의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서 미술애호회란 모임이 만들어지고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면서 연구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회원으로 나온 김용준은 언제나 김환기에 대해 ‘키가 크고 사람이 시원스럽고 그림도 좋지만, 문장도 잘 쓰는 멋쟁이’란 칭찬을 끊임없이 했다고 한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7-48쪽
  • 당시 성북동은 고추밭이 많은 한적한 곳이었다. 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별장 서너 채와 초가집이 띄엄띄엄 있고, 맑은 공기와 수목의 향기,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자연 환경이 아주 일품이었다. 김환기는 자신의 새로운 아호를 나무와 이야기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수화라고 지었다. 얼마 후 신혼집에 들린 김용준이 이 얘기를 듣더니, 자신이 기거할 때는 상허 이태준이 지어 준 노시산방이라 했으나, 수화와 향안에서 한 자씩 따서 ‘수향산방’으로 바꾸라고 제안하고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47년 어느 날 김용준이 수향산방에 찾아온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환기는 먹과 종이와 벼루를 준비한 다음 김용준에게 그림 한 점을 부탁한다. 김용준이 웃으면서 즐겁게 그려준 그림은 바로 김환기의 모습이었다. <수화노소인 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 이 그림을 김환기 부부는 족자를 해서 대청에 내다 걸고 보며 즐거워했다. 김용준은 키가 큰 김환기와 작고 아담한 김향안이 수향산방 집 마당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 <잊혀져가는 우리 동네 옛 이야기를 찾아서1. - 김환기> (주)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8쪽
  •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환기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3년 후 돌아온 성북동 집은 전쟁 통에 피폐해지고 온통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과 성북동의 익숙한 풍경에 그들은 다시 편안함을 느꼈다. 성북동 생활에 만족했던 김환기는 성북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산방기>라는 수필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 <산방기>, 김환기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9쪽
  • 2. 노시산방의 두 예술가-근원 김용준 수화 김환기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의 인연은 고즈넉한 성북동에 깃들어 있다. 그 중 노시산방老枾山房은 근원과 수화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살았던 곳으로 두 예술가를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발원지다. 지금은 무심히 시간이 흘러 표석조차 없는 곳으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늙은 감나무는 그 시절을 사색하듯 그곳을 지키고 있다. 수화 김환기가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것은 1944년 김향안과 결혼식을 올린 직후이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중에서 노시산방은 이렇게 두터운 인연의 매듭으로서 새로운 주인장의 신혼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주면서 그 이름을 수화의 수樹 자와 김향안의 향鄕 자를 따서 ‘수향산방’이라 부르고 〈수향산방 전경〉이란 그림으로 남겼다. 그 그림 속에는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가 오랜 감나무 아래 정겹게 마주 하고 있다. 비록 수화가 그곳에 살았던 시간은 짧았지만 근원과 수화를 묶어주는 근원지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떠나며 하나의 수필을 남겼고 거기에는 두 사람이 예술가로서 소통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는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 김용준, 「육장후기」중에서 근원과 수화의 삶이 깃든 노시산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한국의 미술을 개척한 두 거장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노시산방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우리가 당면한 문화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0-213쪽
  • 수화 김환기 수화 김환기(1913~1974)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서 또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세계 속에 한국의 미술을 이끌어 올린 독보적인 예술가로 각인된다. 수화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물론 그의 그림이나 글은 모조리 항아리 예찬으로 시종하는 것이지만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수화의 그림이나 글도 필경 싱겁기 짝이 없으려니 했더니 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화와 문은 요외로 감각이 예리하고 색채가 풍부하고 범속한데서 한층 뛰어난 짓을 곧잘 한다. ― 김용준, 「키다리 수화 김환기론」중에서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27년 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교를 다니던 중 1933년 동경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서 공부하였다.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는 한편 신미술 운동에도 참석하였으며, 1937년 귀국한 이후 당시 고답적인 사실주의 화풍에 반하여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분기점으로써 또한 한국 현대미술의 1세대로서 신사실파의 활동을 그 축에 두기도 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김환기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서 1952년부터 1956년 파리로 건너가기 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한국 현대회화의 선각자로서 수화 김환기는 자연을 통하여 한국적인 감성을 담고자 그 일관된 작업 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는 주로 항아리, 달, 별, 학, 구름, 밤하늘 등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소재를 다루었다. 크게 뉴욕 체류를 기점으로 그 전과 후로 작업세계를 나누는데 전기는 한국적인 소재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고 후기는 삶의 본질을 추구하며 절대 추상으로 나아간다. 그는 동경 유학과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오랜 시간을 서양의 문화 속에서 보냈으나 그가 늘 추구했던 한국적인 정신과 소재는 변치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동양의 중심에서 그 본질과 내적인 모습들에 마음을 쏟은 예술가였다.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파리라는 국제경기장에 나서니, 우리 하늘이 더욱 역력히 보였고, 우리 노래가 강력히 들려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것이 아닌 그것은 틀림없이 모방 아니면 복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김환기, 「편편상」중에서 김환기에게 성북동은 각별한 곳이었다.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살다가 가족들의 불편함 때문에 종로구 원서동 양옥으로 잠시 이사하기도 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머물게 된다. 1956년 김환기는 파리로 떠나고 가족들은 1960년대까지 그 집에 살게 된다. 현재 ‘노시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성북로 168) 수월암 부근이며 김환기의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선잠로 56)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옛 번지와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집을 구하는 친구마다 나는 성북동으로 오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성북동은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심한 친구는 성북동은 못 살 곳으로 안다. 교통이 불편한 것을 첫째 흠으로 잡는다. 실은 성북동이 좋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중략)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뺑뺑 도는 세상이다. 헌데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상현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 김환기, 「산방기」중에서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6-219쪽
  • 근원과 수화 1947년 근원 김용준은 수화 김환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 〈수화소노인 가부좌상〉은 수화의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되어 근원의 수화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산정 서세옥의 회고에 따르면 수화는 항시 짐 속에 이 작품을 싸서 갖고 다녔고 끝까지 애장하였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온 뒤로 한번은 노시산방의 새 주인 수화를 만났더니 그 의 말이 ‘노시산방을 사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기고 보니’ 나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수화는 가끔 나에게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그가 사랑하는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옛날 시인 송씨의 집을 산 사람을 연상하게 되고, 옛날 세상에만 그러한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각박한 세상에도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은 있구나 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오늘에도 가장 큰 보물을 얻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함을 느낀다. ― 김용준, 「육장후기」중에서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는 1930년대 김환기가 일본에서 돌아와 고향과 서울을 오가던 시절 만났으리라 추측한다. 두 사람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전해지며 서울대학교 설립 시절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과 함께한 승가사의 바랜 사진 속에는 김용준과 김환기가 나란히 앉아 있다. 분명 두 예술가는 서로의 마음속에 공감이라는 소통의 단어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근원과 수화는 한국의 미술 문화를 고결하고 독창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렸고 격조 높은 민족적 미학을 새로이 정립했다. 두 예술가를 만나기 위한 여정 속에는 한국의 멋이 깃든 그림과 글이 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삶과 사람이 울림으로 퍼져 있음을 느낀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사람의 인연으로 가득 찬 성북동 갈림길. 이곳은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의 마음을 빼앗은 순수하고 아련한 마을이다. 이제 노시산방은 관념의 공간으로서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의 상징적인 터전으로 남게 되었다.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두 예술가가 남긴 정제되고 순도 높은 미적 향취가 여전히 성북동에 남아있다는 것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9-221쪽
  • 지금까지 이태준, 정지용, 조지훈을 이야기 했지만 김용준, 그리고 노시산방과 뗄 수 없는 사람은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수화 김환기이다. 김환기는 1913년생이니 김용준보다 9살 어리다. 하지만 당시는 만나면 ‘민증부터 까라’고 하며 한 살 두 살 나이를 따지는 악습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예부터 선비들은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그것을 벗이라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김용준은 김환기를 각별히 생각했다. 그는 김환기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오늘에도 가장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함을 느끼’는 인물로 묘사한다. 김환기 역시 김용준을 각별히 생각했다. 노시산방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김환기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일이 생긴 것 자체를 김용준에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용준을 만나면 돈도 주고 아끼는 골동품도 주곤 했다. 그 둘이 각별한 사이임은 김용준이 아끼던 그의 집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긴 것에도 드러난다.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떠난 후 혹 아끼던 늙은 감나무가 지나가는 자신을 행인처럼 볼까 남의 시를 빌려가며 두려워했다. 김용준은 노시산방을 떠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집을 팔고서 鬻廬 어쩔거나 근래 들어 뼈를 에는 가난으로 自歎年來刺骨貧 내가 살던 집 이젠 벌써 이웃에게 넘어갔네. 吾廬今已屬西隣 다정하게 뜰에 선 버들에게 묻노니 慇懃說與東園柳 앞으로 만나면 행인처럼 보려는가! 他日相逢是路人 위 시는 이름 모르는 시인의 것이지만, 김용준은 이 시를 빌려 집을 떠나는 안타까움을 말한다. 특히 작품 속 주인공이 버드나무가 혹여 자신을 행인처럼 볼까 두려워했듯, 김용준도 자신이 떠나면 ‘늙은 감나무老枾’가 자신을 잊을까 노심초사했다. 또한 그는 성북동도 사랑했다. 시골과 같은 성북동의 정취를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성북동과 노시산방은 그가 아끼던 마을이고, 집이었다. 그런 그가 이곳을 떠나야 할 때 맡긴 사람이 바로 김환기였으니, 그가 김환기를 믿고 생각하는 마음은 보통이 아니려니와, 김용준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집을 선뜻 택한 김환기의 김용준을 생각하는 마음도 보통은 넘는다. 김용준은 주인이 바뀐 집에 새 이름도 지어준다. 김환기의 호 수화樹話에서 수樹를 따고, 그의 아내 김향안金鄕岸에서 향鄕을 따서 수향산방이라 했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라는 것일 수도 있고, 이태준이 그랬듯 그냥 벗에게 멋진 당호 하나 선물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유독 아끼던 늙은 감나무에 생각이 닿으니, 혹 그가 늙은 감나무 하나만은 자기 것으로 지키고 싶어 새 이름을 지어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성북동에는 김용준도, 김환기도 없다. 그리고 김용준을 찾아왔을 이태준도, 조지훈도 모두 떠났다. 그들이 한 번쯤 방문했을 노시산방 역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늙은 감나무 한 그루는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그 감나무는 지나가는 행인 사이에서 김용준을 기다리고 있을까?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4-228쪽
  • 김광섭의 집 1. 성북동 168-34 그리고 160W 73rd St, New York - 빛나는 노년 2015년 8월, 오래된 엽서 한 장이 신문에 소개되었다. 화가 김환기(1913~1974)가 시인 김광섭(1905~1977)에게 보낸 엽서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에는 엽서의 앞, 뒷면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앞면, 보내는 사람 김환기의 주소는 160W 73rd St, New York. 미국 뉴욕이었다. 받는 사람 김광섭의 주소는 서울 성북동 168-34. 1966년 1월, 뉴욕 맨해튼에 가 있는 김환기가 성북동의 김광섭에게 보낸 엽서였다. 뒷면의 편지글은 김광섭에게 부디 서러워 말고 빨리 건강을 찾아 환희에 찬 싱싱한 시를 써달라는 김환기의 당부였다. 익히 알려진 다른 김환기의 엽서와 달리 아무런 그림이나 장식이 없는데, 이는 얼마 전 김광섭의 모친이 별세한 것을 의식한 까닭이다. 1965년 4월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같은 해 10월 노모까지 여의는 변고를 당한 시인을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외로우시겠지. 할 말이 없어요. 빨리 일어나셔요. 빨리 건강을 되찾으세요. 그래서 겨울산에도 가고 술집도 찾고 하게요. 나는 기타 하나와 스케이트 한 벌을 사고 싶어 벼르고 있어요. 이런 것으로 무심 해지는 취향을 갖고 싶어요. 나도 빨리 일어나서 허드슨 강가에나 부지런히 나가고 건강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참신한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부디 서러워 마시고 빨리 건강해지셔서 환희에 찬 싱싱한 시를 써 주십시오.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럼 부디 안녕― 또 쓸게요. 수화(樹話) 배(拜) 1963년 10월, 김환기는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후 귀국하는 대신 뉴욕행을 선택했다.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예술을 평가 받기 위하여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나가기 위한 결정이었다. 유학 시절 일본을 오갔던 것을 제외한다면 파리에 이어 두 번째 외국 생활이었다. (뉴욕에서의 생활이 그의 인생의 종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홍익대 미대 학장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지위도 과감히 예술을 위해 포기했다. 경제적 고려는 뒷전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순우(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가 미국 록펠러재단에 창작지원금을 알아봐 주었고, 한국에 있던 아내 김향안이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원금을 신청하였다. 승인 절차는 순조로워 김환기는 이듬해 9월부터 1년 간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뉴욕에서 방을 얻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달 뒤 아내가 합류했으나 곧 1년간의 지원금도 끊기게 되자 부부는 경제난에 시달렸다. 김환기는 미국의 화상들에게 그림을 팔기도 했지만 아직 미국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때라 큰 수입을 바랄 순 없었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내 김향안이 글쓰기를 비롯해 이일저일을 해가며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나갔다. 캔버스도 구하기 어려워서 신문지와 전화번호부 종이에다 유화를 그린 적도 많았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었기에 원망도 있을리 없었다. 오직 그는 예술의 부름에 충실했을 뿐이다. 길은 이미 자신의 그림에 맡겨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과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눈앞에서 감지할 수 있게 된 첨단의 환경에서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주제와 기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랜 고투와 모색이 필요했다. 김환기는 이전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든 구상을 일체 포기하고 전면적인 추상화로 전환했다. 명징하고 세련된 색감은 여전했지만 화가는 그 위에 단순한 점, 선, 면과 같은 추상적인 형태만 그렸다. 김환기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점화點畵’ 들이 뉴욕에 있는 그의 화실을 채워나갔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김광섭 시인이 새로운 모색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김광섭과 김환기, 둘의 인연은 멀리 193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환기가 서울의 문인들과 교분을 트게 된 것은 1938년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1905-1982)의 부탁을 받고 함대훈(1906-1949)의 소설집 『폭풍전야』의 표지화를 그려주면서부터다. 김환기는 이헌구를 통해서 서울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이헌구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광섭이었다. 둘은 동갑에 같은 함경북도 출신인데다 김환기도 잠시 다닌 적이 있는 중동학교를 나란히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헌구는 불문학, 김광섭은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이헌구라는 다리를 통해 김광섭과 김환기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8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은 둘의 우정이 평생토록 이어졌음은 앞서 소개한 엽서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39년 6월에 발행된 문학잡지 『문장』 제5집은 흥미로운 자료인데 여기에는 김환기의 권두화와 김광섭의 대표 시 「마음」이 함께 실렸다. 그림과 시가 하나의 주제 아래 묶인 것은 아니지만 훗날 「저녁에」라는 시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에서 보이는 시인과 화가의 예술적 교류의 싹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광섭과 김환기 둘 다 성북동에 거주한 때가 있긴 했지만 같은 시기 성북동에서 지낸 적은 없다. 김환기가 성북동에 주소지를 둔 것은 1944년부터 1956년까지, 김광섭은 1961년부터 1966년까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30년을 훌쩍 넘게 이어온 인연이니만큼 서로 주고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감상과 격정을 분방하게 표출하지 않고 논리와 지성의 토대 위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알고 창작활동을 해나갔다는 점에서 장르는 다르지만 둘의 예술적 지향은 통하는 점이 많았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로의 작품을 가지고 논한 글이 없어 어떤 근거를 대면서 논할 여지는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작품과 생활 태도를 접하면서 어렴풋한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섭의 시와 김환기의 그림은 하나의 숙제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작품은 우리 시대 문학과 미술을 아우르는 미학적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중략) 고국에서 병을 이겨내며 ‘싱싱한 시’를 써 나가는 김광섭의 모습은 뉴욕의 김환기에게 큰 힘이 되었을 법하다. 김광섭에게 엽서로 보내는 위로와 응원은 어찌 보면 자신에게 향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 이 시기에 내놓은 김환기의 그림과 김광섭의 시는 각자의 일생일대에 가장 완성도 있는 작품들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고통이 어떻게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가를 두 원로 예술가들은 작품으로써 당당히 후배 예술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어쩌면 이 두 예술가들은 굳이 말년의 걸작들을 내놓지 않았더라도, 이미 이루어놓은 업적으로만 점수를 매겨도 한국 미술사와 문학사에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역경을 밑거름 삼아 기어이 자신의 전작들을 뛰어 넘는 새롭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성과들은 고스란히 후배 시인, 화가들의 예술적 자양분이자 넘어서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46-250쪽, 254-255쪽
  • 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시와 그림의 이중주 (중략) 김환기는 이 마지막 시어의 떨림에 그림으로 화답했다. 뉴욕에 있던 그가 1970년에 완성한 추상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그것이다. (김환기는 이 그림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 대상전에 응모 형식으로 고국에 보내왔다. 대상을 받았지만 이미 한국 화단에서 톡톡히 원로 대접을 받고 있던 그에게 상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굳이 주최 측의 응모 청탁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뉴욕에 서 개척한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국내에 소개하자는 의도에서였다.) 화가는 넓은 캔버스 가득 짙은 색으로 칠한 다음 그 위에 손톱만한 검은 사각형을 수없이 그려 넣고 각각의 도형을 흰 테두리로 감쌌다. 사각형이라고는 하나 저마다 다른 모양, 다른 두께의 테두리, 다른 표정을 띠고 있다. 배경의 색은 전작들에서 보여 주었던 밝은 색조가 아니고, 어두워져 가는 하루의 막바지 검은 색에 가까워 가는 하늘의 색이다. 그 검푸른 공간 속에서 깜박이는 무수한 사각형들과 그 형태의 다름에서 유발 된 긴장이 한없이 잔잔한 떨림으로 화폭 가득 흐른다. 물론 그 작은 도형들을 꼭 하늘의 별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어떤 생명체의 무수한 세포들, 수많은 증명사진들의 집합으로도 보인다. 그림은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렇게 한동안 그림을 보다가 다시 김광섭의 시 속으로 돌아오면, 이제 저녁별은 하나가 아니라 다시 여러 뭇별과 함께 빛나며 나를 내려다본다. 별을 쳐다보는 나 역시 하나가 아니라 지상의 여러 길동무 혹은 수많은 기억들과 함께이다. 바야흐로 그림이 시를 읽고 시가 그림을 읽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내가 놓이게 된다. 이 흥미진진한 경험! 인생의 황혼기에 고독한 눈으로 죽음과 이별을 응시했던 두 예술가가 우리에게 선사한 시와 그림의 멋진 이중주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58-260쪽
  • 수화(樹話) 김환기는 서양화가로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김환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36년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한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이다. 해방 후에는 산, 강, 달 등 자연을 소재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을 선보였다. 1947년에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이 모여서‘신사실파’를 결성하였다. 1948년에 1회 창립전을 열었고, 다음해에는 장욱진이 가세하여 2회 전시를 하였다. 화가의 새로운 시각으로 사실을 해석한‘ 새로운 사실’이라는 순수 창작의 열정은 이후 김환기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 김환기가 성북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근원 김용준과 인연 때문이다. 김환기와 김용준은 나이 차이가 아홉살이나 되었지만 서로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이였다. 1944년 김향안과 결혼한 김환기가 신혼집을 구할 때 김용준과 상의를 하고 마침 이사를 가려던 그의 집을 샀다. 김용준이‘노시산방’이라 하였던 집은 주인이 김환기로 바뀌며‘ 수향산방(樹鄕山房)’이 되었다.
  • 1913-1974 전남 신안 출생.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하였다. 해방 후에는 산, 강, 달 등 자연을 소재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을 선보였다. 집안 곳곳에 조선 백자를 두고 완상하며 그림에 담았다. 항아리와 달, 여인, 꽃, 새, 사슴 등을 그린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1956), 「항아리와 새」(1957), 「정」(1957), 「항아리」(1958) 등이 대표적이다. 1944년 김향안과 혼인 하여 김용준이 살던 ‘노시산방’을 이어 받아 자신의 호와 아내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 이름 붙였다. 1948년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274-1번지에 집을 마련한다. 새로 구한 성북동 집은 ㅁ자 형의 반듯한 한옥이었다. 성북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수필집 「산방기」를 발표하기도 한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1960년에는 신설된 미술대학 학장을 지냈다. 이때 학교와 가까운 마포로 이사한다. 1963년 한국대표로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후 뉴욕에 정착했다. 뉴욕 시절부터 무수한 점으로 가득찬 점화點畵를 그렸고, 1970년 한국일보 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절친한 친구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영감을 얻어 그의 시 구절을 딴 제목을 붙인 작품이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6쪽
  • ·서양화가, 김향안의 남편 ·호 수화(樹話). 전남 신안군 안좌도 출생 ·일본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미술운동 참여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길진섭(吉鎭燮) 등과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고 개인전을 통하여 신미술운동에 적극 참여 ·광복 후 1946년에서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 ·1944년 김향안과 결혼 후 결혼과 함께 성북리 274-1번지의 김용준의 집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신혼생활 시작(1948년 종로구 원서동으로 잠시 이사하였다가 성북동 31-2번지로 이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6쪽
  • ·서양화의 추상, 반추상적 기법을 표지 디자인에 적용 ·주요 장정 ▶ 『해방문학선집』(1948, 종로서원) ▶ 이태준, 염상섭, 김동리 등 9인의 단편소설집. ▶ 표지 그림(김환기), 본문 삽화(김용준) ▶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증보판)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9쪽
  • [ 32 ] 성북의 서양화가들 1. 김환기(1913-1974) 호는 수화(樹話). 김환기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커다란 화면을 한가득 점들이 채우고 있는 추상화나 간단한 선들로 표현된 백자 항아리와 매화, 날개를 펼친 학 같은 것이다. 추상이건 구상이건 간에 모두 세련된 색감과 화면구성으로 단번에 수화의 그림임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수화가 떠난 지 40년이 넘었지만 그의 그림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직후의 힘들고 우울했던 한국의 어느 화가가 그렸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앞서간 아방가르드 그 자체였다. 아마 그의 세련된 미감은 전남 신안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별로 어려움 없이 자란 환경 덕분이 클 것이다. 그는 프랑스 라디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 뿐이 아니라, 동해 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눈 부시게 푸른 하늘과 흰수건에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은 바다를 보며 자라났다. 푸른 색 못지 않게 흰 색을 사랑한 그는 백자를 늘 끼고 완상하며 영감을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푸른 배경에 흰 달항아리를 그린 작품이 유독 많다.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했다. 1937년 일본 자유미술협회 회원으로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한국화가로서 참여한 그는 귀국한 이후에는 조형이념으로 결성된 최초의 화파인 ‘신사실파’를 결성하고 유영국 이규상 이중섭 장욱진 등과 함께 새로운 예술인 추상미술의 세계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44년 화가 고희동의 주례로 김향안과 혼인한 이후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수향산방으로 고쳐 부르며 신혼살림을 하던 부부는 4년 후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했다가, 곧 다시 성북동으로 274-1로 돌아와 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머문다. 좋은 백자만 보면 외상으로라도 꼭 사야만 할 정도로 백자를 사랑한 수화의 성북동 집에는 늘 백자가 발에 채일만큼 쌓여 있었다. 한국전쟁 때 백자를 가지고 피난 갈 수가 없어서 모두 마당에 묻어 두고 피난을 떠났는데, 돌아와 보니 모두 깨져 버려 무척이나 슬퍼했다는 대목이 그의 수필에 나온다. 이 시기에 서울대, 홍익대 등에서 교육자로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미술협회에서도 미술행정가로서의 자질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와 함께 홍익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 선생은 “겉과 속 모두 멋쟁이였던 예술가 그 자체”로 기억했다. “하루는 수화가 내 연구실에 와보더니 미술이론을 가르치는 선생 방에 작품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림을 하나 걸어주고 갔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 그림이 바로 유명한 ‘사슴’이다. 이경성 선생은 언젠가 급전이 필요해 이 그림을 친구에게 담보삼아 맡기고 돈을 꾸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그 친구가 몇 십 년 후에 화랑의 강권으로 몇 억에 내다 팔고 자신에게 얼마간의 사례를 가지고 왔던 적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 그림은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대표작 중 하나로 걸려 있다. 1956년 파리로 떠났다가 돌아온 이후,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나서 뉴욕에 영구정착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간에 대한 연민 등의 감정을 순수한 추상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펼쳐진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그의 절친인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작품화 한 것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각기 다른 점들은 시의 내용처럼 고국에 두고 온 그리운 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려낸 역작이었다. 하나하나의 점들은 은하수를 가득 채운 별들처럼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그리운 얼굴들이 되어 떠오른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이 작품은 뉴욕으로 떠난 수화가 한국화단에서 거의 잊혀질 무렵이던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 1회 대한민국미술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았다. 그의 아내 김향안(1916~2004)은 수화의 부인이자 예술세계의 동반자로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신여성이자 그 자신이 수필가이기도 한 김향안은 수화의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그의 예술을 지지하고 오로지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했다. 김향안은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환기 재단과 박물관을 세워 수화의 예술세계를 알리는데 남은 인생을 바쳤다.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에는 그의 대표작들과 함께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01쪽
  • [ 51 ]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집 1. 김환기와 변동림(김향안) ○ 1943년 봄 김환기와 변동림은 일본인 시인 노리다게 가쯔오의 소개로 만나 1944년 5월 재혼 ※ 노리다께 가쯔오는 시인 백석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 ○ 변동림은 김환기와 결혼을 하며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꿈 변동림이 김환기의 아호인 ‘향안(香岸)’을 이름으로 쓰겠다며, 김향안으로 평생 김환기를 위해 살겠다고 함. 김환기는 ‘수화(樹話)’로 아호를 바꿈 결혼 주례는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사회와 청첩인은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7쪽
  • 2. 노시산방의 다른 이름, 수향산방 ○ 1944년 김용준은 김환기·김향안 부부에게 노시산방을 팔고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 - 김용준 수필, 「육장후기(鬻莊後記)」 참고 ○ 의정부로 이사한 후에도 김용준은 수시로 수향산방을 찾아 김환기와 미술을 논하곤 했음 - 김용준의 그림 <수향산방 전경>(1944) : 산방의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 - 김용준의 그림 <수화소노인(樹話少老人)가부좌상>(1947) : 김용준이 1947년 수향산방을 찾아가 김환기의 모습을 그린 그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7쪽
  • 3. 성북동에 두 번째로 마련한 집 ○ 1948년 시골에서 모셔온 김환기의 모친이 성북동이 시골 같다고 불평을 하므로 시내의 원서동으로 이사했다가 그해 여름 식구들이 알 수 없는 열병으로 신음하자 다시 성북동에 집을 구하여 이사 ○ 1956년 김환기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갈 때까지 성북동 31-2번지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 - 김환기의 수필, 「산방기(山房記)」에 이곳에서의 생활 정경이 잘 드러나 있음. 모습을 그린 그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7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 김환기 주소(현재) : 성북동 274-1, 성북동 31-2 분야 : 미술(서양화) 비고 : 수향산방, 김향안의 남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정의 「향(響)」, 「월광」, 「영원의 노래」, 「산월」, 「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개설 호는 수화(樹話).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 1936년 니혼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연구과를 수료하였다. 활동사항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길진섭(吉鎭燮) 등과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는 한편, 자유전(自由展)의 출품과 아마기화랑(天城畫廊)에서의 개인전을 통하여 신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8년에서 1950년까지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6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서구 미술을 3년간 체험하고 귀국하였다. 한편, 1952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파리를 다녀온 후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술학부장과 학장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965년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ale)의 커미셔너로 출국하여 회화부분 명예상을 수상한 뒤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죽은 뒤에 뉴욕과 서울에서 각각 그를 위한 회고전이 열렸다. 작품세계 작품 경향은 크게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하는 수업 시대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하여 볼 때,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등에서 시도된 기계의 찬미 등에서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 광복 이후부터 부산 피난 시절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적 소재의 발견으로 일관되었다. 달과 산과 구름과 학 그리고 나목(裸木)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경향이었다. 약 3년간의 파리 시대는 이러한 주제가 더욱 요약되고 함축된 이른바 양식의 심화기로 볼 수 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워 버린다든지, 극히 단순한 선으로 요약된 산과 몇 그루의 나목과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파리에서 돌아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서울 시대는 파리 시대의 지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성이 보다 단순해지면서 상징적 요소가 더욱 짙게 내포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이라든지, 곡선의 중첩으로 상징되는 산 그리고 몇 개의 사각 점획들로 대변되는 풍경 가운데의 점경 등이 상징적이면서 풍부한 공간 해석으로 이끌어 갔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 때까지의 약 10년간의 뉴욕 시대는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하여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묘는 추상 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도 없어졌다. 그 대신 수묵(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있다. 그는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구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대 화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오광수, 열화당, 1979) 『한국현대화가십인(韓國現代畫家十人)』(오광수, 열화당, 1976) 『김환기화집(金煥基畫集)』(국립현대미술관, 1975)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이경성, 열음사, 1980)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김환기(金煥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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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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