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응성
1916.10.26 - 1979.03.04
인물 개인 화가
화가이다.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대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시키며 등단하였다.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귀국 후, 1943년 2월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에 가입해, 조선징병제시행기념 집단 창작에 참여하였다. 1944년 9월에는 첫 개인전을 가지며 양화계의 신예작가로 부상하였다. 해방 이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조선미술문화협회와 목우회에 참여했다. 손응성은 1948년부터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약 30여 년간 보문동 한옥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사망 후 위패는 보문사에 안치되었다. 197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상을 받았고, 친일행적으로 인해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보문동
  • 손응성씨개전(孫應星氏個展)
  • 손응성 가옥
  • 손응성 가옥 표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2가 87 (지봉로23길 4)

근거자료 원문

  • 손응성은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시키며 등단했고,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유학하며 서양화를 공부했다. 홍익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미술문화회, 목우회 활동을 했다. 창덕궁의 비원을 그려 비원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등 사실주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남겼으나, 타계할 때까지 한 번도 개인전을 갖지 못했다. 소설가 최인호는 손응성 누이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최인호는 한 산문을 통해 외삼촌인 손응성을 가리켜 평생 ‘조선의 빛깔과 영혼’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손응성은 일제강점기 말에는 단광회(丹光會)를 결성하고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 집단 창작에 참여하는 등의 행적을 보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17-118쪽
    원문에는 손응성이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최인호가 쓴 에세이 「외삼촌 손응성 화백」을 근거로 나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손응성이 1944년 개인전을 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1944년 9월 26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도 1944년 9월 27일에서 10월 1일까지 5일간 화신백화점 7층에서 개인전을 열린다는 기사가 개재되어 있다. 따라서 손응성이 1944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것이 더 타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정의 1916∼1979. 화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16년 강원도 평강에서 출생했다. 평안남도 순안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으로 이사, 중동중학교에 진학했다가, 배재학교로 전학한 후 2학년 때 자퇴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특선으로 입선했다. 이후 일본인 미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선과에 입학, 졸업할 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1937년 선전에서는 양장의 젊은 여인상을 그린 「청복(靑服)」으로 두 번째 입선한 데 이어서, 1939년에는 어머니를 그린 한복의 부인상인 「초상(肖像)」으로 입선했다. 일본 미술학교를 졸업하던 1940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스키복자(服姿)」(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로 특선에 입상했다. 그 뒤에도 「부인상」(1941), 「풍경」 (1942), 「오후」(1944)로 선전에서 거듭 입선했다. 1944년 9월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며 양화계의 신예작가로 부상했다. 귀국 후, 경성에서 활동하던 다이헤이요미술대학 동문으로 구성된 PAS동인전에 참여했고, 1943년 2월 조선과 일본의 화가들이 모여 조직한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에 가입해, 조선징병제시행기념 집단 창작에 참여, 화필보국(畫筆報國)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1950년부터 1960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1947년 우익계열의 미술단체인 조선미술문화협회에 가입, 활동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화가로 참전했고, 1949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를 지냈다. 1958년에는 사실주의를 표방한 미술단체인 목우회에 참여했다. 1979년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상(1974)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손응성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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