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소
1867.04.13 - 1928.08.18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현 성북구 정릉동 603-3)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 중에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무장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군인양성소 사령관, 신민부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지린성에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릉동
  • 나중소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羅仲昭
  • 이명칭: 영훈(泳薰), 포석(抛石), 봉길(奉吉), 나비장군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26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603-3
  • 비고: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5통 7호 603번지

근거자료 원문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한 후 1917년 경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백운평과 천수평 등지에서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백발 장교로 참여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대첩 후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북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체로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었고,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영안현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자 선생은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 향관(餉官)에 임명되었다. 1928년 8월 신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중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 본적: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5통 7호 603번지 주소: 경성부 정릉동 1통 1호 계열과 단체: 북로군정서 <활동 내용>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1917년 경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백운평과 천수평 등지에서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백발 장교로 참여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대첩 후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북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체로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었고,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영안현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자 선생은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 향관(餉官)에 임명되었다. 1928년 8월 신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중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나중소 장군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박환,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중소」(2016. 9).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중소」(2016. 9).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7년-나중소 만주로 망명 1924년-나중소 북로군정서 재조직, 서무부장 및 참모 활동 1925년-나중소 만주에서 신민부 활동 1928년-나중소 지린성에서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1쪽
  • ○ 성북구 출신 독립운동가 나중소 청산리 전투의 백발 영웅 1867~1928 / 독립장 / 정릉리 106번지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지방군대인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활동 중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대한정의단 군사교관으로 초빙돼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대한정의단이 북로군정서로 확대된 후 참모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군인양성소 사령관, 신민부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지린성에서 순국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5쪽
    <성북구의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가 발굴․조사 용역 결과 보고서>에는 나중소의 주소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5통 7호 603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 ○ 독립군으로 거듭난 김규식과 나중소 - 김규식과 비슷한 길을 걸은 또 한 사람이 나중소입니다. 성북구 정릉동에서 출생해 16살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지방군대인 대한제국 진위대의 부위(위관급)로 활동했던 그는 정미7조약으로 인한 군대 해산 이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합니다. 망명 당시 이미 50대의 장년의 나이였지만 항일 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은 강했습니다. 이렇듯 두 사람은 경술국치를 전후로 앞으로 전개될 긴 싸움에 대해 분연히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들이 만주 독립군의 주역이 되리라 누구도 상상치 못했겠지만 독립을 향한 두 사람의 열망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2-33쪽
  • ○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초석을 다지다 만주의 동쪽, 북간도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이 지역에는 북로군정서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었다면 북간도에는 대종교를 믿는 단체인 중광단이 후원한 부대 북로군정서가 있었지요. 그리고 북로군정서에 바로 노은 김규식과 나중소가 있었습니다. 앞서 항일 의병투쟁으로, 또 대한제국 진위대의 군인으로 활동했던 두 청년들을 기억하나요? 그들이 만주로 망명해 들어간 부대가 북로군정서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역사의 멋진 기록을 남긴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지요. 1910년대는 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의 청산리 전투와 같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교육체계를 갖추고 치밀하게 준비를 하던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5쪽
  • ○ 험난했던 두 독립투사의 길, 그리고 창대한 끝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내려옵니다. 1925년, 독립군들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부대를 정비합니다. 나중소는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됩니다. 같은 해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으로도 활동합니다. 그 와중에 일본은 중국의 만주 군벌과 ‘독립군을 잡아 일본에 넘기면 돈을 주겠다’는 요지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해 독립군을 끊임없이 탄압합니다. 이로 인해 북간도로 돌아온 김규식 역시 동지들과 재기를 모색하는 와중 중국 관헌의 제지와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는 나중소와 마찬가지로 신민부에 가담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의 미쓰야 협정에 맞서 3부 통합운동을 전개합니다. 그 결과 북만주 지역의 혁신의회, 남만주 지역의 국민부가 설치되는데 3부를 하나로 통합하지 못한 이유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념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조국해방이라는 같은 목적을 두고도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까닭에 1920년대 이후 항일 운동사는 두 가지 갈래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지요. 안타깝게도 김규식은 1931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백운봉, 최호 등의 반대세력의 습격으로 서거합니다. 나중소는 이보다 앞선 1928년 지린성 돈화현 산중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순국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해방된 조국을 다시 밟지 못한 채 타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위해 온 생애를 다 바쳤음을 기록하고, 또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9-80쪽
  • ○ 에피소드 일곱-50대 장년의 나이로 만주에 망명해 백발을 휘날린 나중소 - 그는 후방에 있기로 한 백발이 성성한 참모장 나중소장군이었다. “아 이 웬일이십니까?, 여긴 위험합니다. 후방에 가 계십시오.” 김좌진장군은 당황한 얼굴로 권면했다. “아닐세. 나는 자네들 곁에 있을라네. 자네들 곁에서 자네들 싸우는 광경을 보려하네. 저 원수 놈들이 하나하나 쓸어져 가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네” 나중소 참모장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시선을 적군 편으로 보냈다. - 동아일보 1958년 4월 22일에 연재된 박계주 소설 「대지의 성좌」에는 백발이 성성한 가운데 청산리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참모장 나중소의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요즘 기준에서 50대는 그리 많은 나이 같지 않지만 사실 쉰 살이 넘은 노장이 전투에 뛰어들어 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활동했던 그가 만주로 망명한 것은 이미 50세를 넘겼을 때였습니다. 어쩌면 은퇴 후 평온한 삶을 원했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그는 대한정의단 군사교관으로 초빙돼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합니다. 그는 예순을 갓 넘겨 지린성에서 별세했습니다. 나중소가 싸웠던 10여 년은 그 어떤 젊은 혈기보다도 뜨거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6쪽
  • ○ 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한 나중소와 김규식 김규식보다 앞서 망명한 나중소는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지요. 백발이 성성한 채로 독립군의 선두에서 위험을 무릅 쓰고 전투에 참여했던 나중소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7쪽
  •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1919년 8월 7일 정의단(正義團)을 개편하여 무장항일단체인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동년 12월에는 이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고, 1920년 5월에는 신민단(新民團)·도독부(都督府)·광복단(光復團)·국민회(國民會)·의군부(義軍府)·군정서(軍政署) 등이 참가한 가운데 북간도 각기관의 통일과 사업발전을 논의할 때 김좌진과 함께 군정서 대표로서 참가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총재 서 일,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등과 함께 참모부(副)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년 9월 9일에는 사관연성소 졸업생 200명과 다른 직위에 보임된 80여명으로 교성대(敎成隊)가 조직되자 대장으로서 부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 이범석(李範奭), 소대장 이민화(李敏華)·김 훈(金勳)·이 탁(李鐸)·남익(南益) 등과 함께 무장항일투쟁을 위한 실력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혼춘(琿春)사건이라는 일본군의 대학살 만행이 있은 후, 뒤이어 일본군 19사단과 21사단이 북로군정서를 목표로 양협작전을 전개한다는 정보에 따라 임전 조직을 단행함에 그는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10월 19일 일본군이 청산리(靑山里)를 3면에서 포위하고 다음날 기병대 1개 부대가 백운평(白雲坪)으로 진입하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적의 전위부대를 전멸시키는 대대적인 전승을 거두었다. 이해 겨울에는 대한독립군단의 일원으로 노령에 들어갔다가 소련정부의 기만책을 예견하고 김좌진과 같이 북만 영안(寧安)으로 돌아와 북로군정서의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그는 참모부위원장 겸 검사위원에 임명되어 무장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28년 8월 18일(음 7월 4일) 만주 돈화현(敦化縣) 산중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0·313·314·320·323·436·44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4면 무장독립운동비사 79·86·107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894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167·170·322·369·382·383·396·402·508면 항일순국의열사전 290면 동아일보(1928. 10. 11)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66·368·384·389·513·515·67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49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735·736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86·970·978·1056·1057면 조선민족운동년감 93·11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3·32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72·774·77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24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3·83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 나영자 여사는 현대 사단법인 독립유공자유족회의 이사를 맡고 있다. 나중소 장군의 둘째 아들 나인상 님의 딸로, 장군의 친손녀가 된다. 종로구 구기동 독립유공자유족회 응접실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는 큰고모 나복희(나중소 장녀)로부터 전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 정릉동에 남아 있는 그분들의 흔적, 젊은 시절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살아 오며 겪었던 어려움들, 광복아파트 거주 시절 이야기, 독립유공자유족회에서의 활동 등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11쪽
    나영자 여사는 나중소 지사의 손녀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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