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용
1886.11.06 - 1976.12.31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장위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며 예정된 시간에 등장하지 않아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이 혼란에 빠졌는데, 이때 경신중학교 졸업생인 그가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체포된 정재용은 평양 감옥에서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 활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77년 12월 31일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자택의 주소는 동아일보에서는 장위동 219-100번지, 경향신문에서는 장위동 219-195번지로 보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위동
  • 독립운동가 정재용 집터 추정(1)
  • 독립운동가 정재용 집터 추정(2)
  • 독립운동가 정재용 집터 추정(3)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219-100
  • 비고: 동아일보에서는 장위동 219-100번지, 경향신문에서는 장위동 219-195번지로 보도됨.

근거자료 원문

  • 황해도 해주(海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원래 거족적인 독립선언식은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학생·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2월 22일 기독교측의 대표로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은 김원벽(金元璧)·강기덕(康基德)·한위건(韓偉健) 등의 학생대표들과 만나 손병희 등이 계획하고 있는 거족적인 독립운동계획에 관하여 설명하고, 학생측이 독자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삼가고 통합대열에 합류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리하여 3월 1일 오전부터 탑동의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든 학생의 수는 5천을 넘었고 상당수의 시민들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여 예정된 시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졸업생인 그가 용감하게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에 큰 무리없이 수천의 학생·시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할 수 있는 도화선에 점화한 것이다. 그후 그는 이해 8월에 체포되어 평양(平壤)감옥에서 2년 6월간의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는 서광신(徐光信)·이기춘(李起春) 등과 함께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義勇團) 활동에 참여하여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5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02·106·33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665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진흠
  • 작성일: 202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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