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영희
1900.10.09 - 1984.03.01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재학 중 만세운동을 논의하였고, 선배와 함께 학교 대표로 학생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일 사전 계획대로 탑골공원으로 갔으나 민족대표들이 장소를 변경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체포되어 약 8개월의 옥고를 치르던 중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고, 1938년경부터 인천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했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남 덕산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설립, 농민교육에 헌신했다. 200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성북동
  • 길영희 사진
  • 길영희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45-1 (선잠로2길 20-15)
  • 비고: 서울 성북(城北) 44-44

근거자료 원문

  • 1919년 3·1운동 때 학생대표로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 2월 20일경 동교 선배인 한위건(韓偉健)을 만나 만세운동 방법을 논의하였고, 김형기(金炯璣) 등 선배와 함께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로 학생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 사전 약속대로 탑골공원으로 나갔다.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등 다수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이 갑자기 장소를 변경하여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을 하자, 그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누군가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그들은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이후 일경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어 약 8개월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 90일 通算)을 받았다. 출옥 후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한 그는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3년 배재고보에 편입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지력과(地歷科)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배재와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한편 1938년경부터는 인천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80·19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61·68·73·101∼103면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11. 6)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 1919. 8. 30)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1983) 제18권 245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 평안북도 희천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학년 때 3·1운동에 학생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경성 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 운동 전력 때문에 공립학교 임용을 거절당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에서 10년간 봉직했으나, 1939년 일제의 압박으로 교단을 물러나 농과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장기려(張起呂)·박원선(朴元善) 등 동지들과 더불어 인천에서 후생농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학부형과 학생 대표들의 요청으로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본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바꾸는 한편,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신념 아래 무감독시험, 개가식 도서관 등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였고 나라의 선비(國士)를 기르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하였다. 5·16으로 1962년 인천중 학교·제물포고등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청남도 덕산(德山) 가루실에 가루실농민학원 을 설립, 낙향하여 젊은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던 농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한국교육이 정치가들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교육자들 자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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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김지훈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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