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1916.12.06 - 1982.02.20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돈암동(현 삼선교로 76)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7년 임시정부에 합류한 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이 되었으며, 1941년 공작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군 제5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제5지대에서 시안(西安)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선전·정보활동을 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 귀국의 편의를 도모하다가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돈암동
  • 김동수 사진
  • 김동수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東洙
  • 이명칭: 金剛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62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5가 7 (삼선교로 76)
  • 비고: 서울 돈암 200-16

근거자료 원문

  • 인천(仁川) 사람이다. 1923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와 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사관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가 유주(柳州)에 있을 때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이재현(李在賢)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여 부대장(副隊長)이 되었다. 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서안(西安)을 본거지로 하여 서북방면으로 전지공작을 전개하여 적의 기밀을 탐지하고 동포청년을 초모하는 등 백여 명으로 구성된 전투부대이었다.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군 제5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대장이 되어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초모·선전·정보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2년 3월 부대원간의 불화로 대장 나월환의 암살사건이 있어 이에 연루되어 무기(無期)의 형을 받고 입옥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광복군의 개편에 의하여 제5지대가 없어지자 그는 제2지대에 편입되어 중국의 중앙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반을 특설하고 박기성·유해준·송호성 등과 함께 일선활동에 필요한 군사훈련과 외국어 등을 교육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경위대(警衛隊, 一名 土橋隊)를 중경에 설치함에 그는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토교대의 주요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광복군의 간부요원 교육과 양성 그리고 일본군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작전 등이었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駐華代表團 東北特派員)으로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 귀국의 편의를 도모하고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45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44·446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6면 무장독립운동비사 20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8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6면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87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379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332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7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6·208·210·229·230·388·464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2012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 1923년 아버지를 따라 상해로 가서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김구(金九)·장졔스[蔣介石]의 합의에 따라,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특설된 훈련반에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 등 한국인 훈련생 90여 명과 함께 입대하여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 사관으로 군무를 수련하였으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난징[南京]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8년 3월창사(長沙)에서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김인(金仁)·이하유(李何有) 등과 함께 중국인을 포함한 약 50명의 특수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 점령 지구인 상해에 파견되어 정보수집·선전·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1939년 11월 한국 청년만으로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하여,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고 자신은 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 해 겨울 이해평(李海平)·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을 이끌고 일선지구인 산시성[山西省]루안[潞安] 방면으로 가서 중국인 후쭝난[胡宗南] 직속의 유격대와 합류하여 정보수집·적정탐색·초모공작 등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 주관 아래 광복군 총사령부가 결성되고, 뒤이어 사령부가 시안으로 진주하여 항일 무장 역량의 총집결을 호소하자, 1941년 1월 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어 총사령부 호위와 사병 훈련을 맡게 되었고, 자신은 제5지대 간부로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 광복군 제5지대 간부로 산시성타이항산[太行山]에서 적 후방공작 및 유격전을 전개하고, 정보수집 및 광복군 초모활동을 하였다. 1942년 5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 한국청년훈련반이 특설되자, 송호성(宋虎聲)·박기성(朴基成)과 함께 구대장(區隊長)으로 임명되어 일선공작에 필요한 군사훈련과 외국어 등을 가르쳤다. 1945년 5월충칭으로 가서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 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임시정부 중화대표단 동북특파원 자격으로 교포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귀환을 돕다가 1948년 6월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연대장·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지훈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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