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1901.09.14 - 1984.01.02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삼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부터 대구사범학교에서 한문·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면서 학생들의 황도교육비판·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 등 비밀결사의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실질적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1941년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물』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 체포되었고, 6개월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 후 대구사범학교 교장, 경북 교육회장, 서울시 교육위원 문화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서울 성북 삼선1 247-1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삼선동
  • 김영기 사진
  • 김영기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65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247-1 (삼선교로10다길 26-3)
  • 비고: 서울 城北 三仙1 247-1

근거자료 원문

  •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1920년에 충남 임시교원양성소를 거쳐 잠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7년에 일본 동경의 대동문화학원(大東文化學院)에 입학하였다. 동교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1930년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의 촉탁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중학교용 〈중등교육 조선어〉 및 〈한문독본〉을 편찬하였다. 1932년부터는 대구사범학교의 한문·조선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어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문화 강의를 통하여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식민지통치하에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에는 문학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고, 우리나라의 역대 시조 백수를 뽑아 여기에 주석을 붙여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시조의 연대표시는 단기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교육은 학생들의 황도교육비판·민족정신의 함양으로 연결되었고,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文藝部) 등 비밀결사의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실질적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이같은 그의 영향은 문예부 뿐 아니라 동교의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다혁당(茶革黨)에도 미쳤음을 물론이고 또 1940년 1월에 발간되었던 교양지 〈반딧불〉도 그의 지도하에서 간행되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동년 8월 일경에 붙잡혔고, 그후 6개월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함께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스승의 관련을 부인하며 변명함으로써 그는 1942년 1월에 풀려나왔다. 광복 후 그는 대구사범학교 교장·경북 교육회장 등을 지냈고 서울시 교육위원 문화위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09·510·52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35·764·76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799·800·1444·1814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지훈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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