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
1877.05.17 - 1925.08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동선동(현 동선동 84-41)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천군의 원동교회 목사로 재직 중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체포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전현의 광복군총영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요인을 암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국경 경비가 강화되어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대원들은 창고 및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유인물을 살포하고 피신했다. 박승호는 세칭 '선천서투탄사건'의 범인 16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동선동
  • 박승호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朴承浩
  • 이명칭: 朴承洗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84-41
  • 비고: 서울 성북 동선 84의 41

근거자료 원문

  •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천군 신부면의 원동교회 목사로 재직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전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암살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방면으로 파견되었으며,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박치의(朴致毅)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선천경찰서 등의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결사대원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으로 가서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투탄하였으나 불발하였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은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였던 그를 비롯하여 20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까지 속속 체포되었으며, 그는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평양형무소에서 신병으로 옥사 직전에 출옥하여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4면 기려수필 29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3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49면 동아일보(1921. 4. 14)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82·641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 3·1운동 때 선천군 신부면의 원동교회 목사로서 전교우를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다 잡혀 투옥되었다. 1920년 9월 1일 미국의원단일행이 내한하였을 때,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세칭 선천서투탄사건의 범인 16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지훈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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