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중
1920.09.29 - ?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성북동에 거주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서울 성북 177번지 25호(현 성북로8길 9)에 거주한 그는 1942년 당시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외부 방송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는데, 미군이 일본군을 제압했다거나 일본군의 패망이 예상된다는 등의 내용 등을 듣고 삼청동과 성북동에 모인 지인들에게 전하며 독립은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했고, 결국 유언비어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성북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5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77-25 (성북로8길 9)
  • 비고: 성북 177번지 25호

근거자료 원문

  • ·성북 177번지 25호 松山高吉방(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 ·1942년 11월 중순 경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에서 동과에 보관중인 경성정유사 소유 전파수신기로 山田國男, 高山得濟, 洪瑾鎬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일본어로써 방송된 내용을 청취하고 일본이 패전할 것을 선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7쪽
  • 노현중은 1920년 9월 29일 생으로 본적이 충남 천안읍 남산정 139번지, 주거가 서울 성북 177번지 25호였다. 그는 23살 때인 1942년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이었다. 그는 1942년 11월 중순 경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에서 동과에 보관중인 경성정유사 소유 전파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전파된 일본어와 한국어 방송을 청취하였다. 그 내용은 “솔로몬군도 방면에서 미국군이 대승하여 일본군은 패퇴되었다는 선전”, “서태평양 솔로문군도의 가다카날섬에서 일본군은 전멸되었고, 미영 연합군은 반격해 온 일본군함을 격퇴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였다.”는 내용과 “연합국은 모두 대국으로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진보된 과학의 힘과 우수한 기술에 의하여 선함, 비행기, 기타 우수한 병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음은 물론 총후국민의 생활도 자못 유복한 반면 일독이의 추축국은 선함 기타의 병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일선 장병의 식량도 궁핍한 상태이므로 장기전이 되어서는 최후의 승리는 영미연합국 측이다. 조선동포는 그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멸하여 조선독립을 단행하고, 일한합병 30년의 쌓인 원한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송출한 일본어 방송에서 “일본군함공병은 대륙적 고등비행에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량이 열악하지만 연합국 측의 항공병은 대륙의 고등비행에 경험이 있어서 자못 우세하다.”는 선전 등을 청취하였다. 이후 노현중은 1943년 2월 하순 경 경성부 삼청정 65번지 신촌민수(新村旻洙)의 집에서 동인 및 두 명과 함께 음주하면서 동인들에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임시정부에서 조선어로써 방송된 내용에 의하면 “금차 대동아전쟁은 서전에서는 미영연합군에 대하여 일본군이 우세한 것 같이 보였지만 일본은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차차 전력이 저하되고 있다. 그에 반하여 미영연합국은 대국으로 경제력도 풍부하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되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연합 측에 있다. 미영연합국이 승리하면 조선은 당연히 독립국으로 될 것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이렇게 소위 조언비어를 한 혐의로 체포된 그는 수년의 옥고를 치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0쪽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사회주의 계열 - 이름: 노현중 - 주소(당시): 성북 177번지 25호 -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7-2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7쪽
  • 본적 천안읍 남산정, 주거 성북동 177번지. 1942년 11월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에 근무하며 미국의 방송을 청취하여 유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 본적: 충남 천안읍 남산정 139번지 주소: 서울 성북 177번지 25호 松山高吉방 계열과 단체: 단파방송사건 <활동내용>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 1942년 11월 중순 경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에서 동과에 보관중인 경성정유사 소유 전파수신기로 山田國男, 高山得濟, 洪瑾鎬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일본어로써 방송된 내용에서 “솔로몬군도 방면에서 미국군이 대승하여 일본군은 패퇴되었다는 선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조선어 방송의 내용에서 “서태평양 솔로문군도의 가다카날섬에서 일본군은 전멸되었고, 또 반격하여 온 일본군함을 격퇴한 미영연합군은 동방면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였다.”는 내용과 연합국은 모두 대국으로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진보된 과학의 힘과 우수한 기술에 의하여 선함, 비행기, 기타 우수한 병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음은 물론 총후국민의 생활도 자못 유복한 반면 일독이의 추축국은 선함 기타의 병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일선 장병의 식량도 궁핍한 상태이므로 장기전이 되어서는 최후의 승리는 영미연합국측이다. 조선동포는 그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멸하여 조선독립을 단행하고, 일한합병 30년의 적원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독립만세라는 선전을 정취하였다. 그리고 重慶에서 일본어 방송의 내용에서 “일본군함공병은 대륙적 고등비행에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량이 열악하지만 연합국측은 항공병은 대륙의 고등비행에 경험이 있어서 자못 우세하다는 선전 등을 청취하였다. 1943년 2월 하순 경 동일장소에서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의 팔목삭일의 전파수신기를 허가 없이 공과에 시설하고 이것을 사용하여 金村炳昱에 대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어 방송을 청취케 하고, 익일 종일 장소에서 홍근호 및 금촌병욱에 대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어와 조선어 방송을 청취케 하였다. 1943년 2월 하순 경 경성부 삼청정 65번지 新村旻洙의 집에서 동인 및 두 명과 함께 음주하면서 동인들에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임시정부에서 조선어로써 방송된 내용에 의하면 금차 대동아전쟁은 서전에서는 미영연합군에 대하여 일본군이 우세한 것 같이 보였지만 일본은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차차 전력이 저하되고 있다. 그에 반하여 미영연합국은 대국으로 경제력도 풍부하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되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연합 측에 있다. 미영연합국이 승리하면 조선은 당연히 독립국으로 될 것이다.”라는 취지로 선전하였다. 그리하여 적국이 우리 총후에 유포하려한 것을 알면서도 이를 선전하였다. <참고문헌> 「대일항쟁기 단파방송사건」(1943.7.21.),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70, 2007.
  • ○ 시국담으로 고초를 겪은 성북인들 성북동에 거주했던 노현중과 이근창은 단파방송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주변에 알렸다가 옥고를 치르게 된 인물입니다. 노현중은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외부 방송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지요. 그는 전파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전파된 일본어와 한국어 방송을 청취했습니다. 주로 미군이 일본군을 제압했다거나 일본군의 패망이 예상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노현중은 이러한 내용을 삼청동과 성북동에 모인 지인들에게 전하며 독립은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했고 결국 유언비어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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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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