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응
1891.09.25 - 1937.04.12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 등과 함께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읍내 교회에 8백여 명의 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모이자, 대형 태극기 2개를 교회에 세워놓고 종이로 만든 백여 개의 작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유여대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행진을 했다. 그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의주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집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진천(鎭川)지부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돈암동
  • 안석응 사진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 비고: 서울市 城北 敦巖 (상세 주소 없음)

근거자료 원문

  • 평안북도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유여대(劉如大)·정명채(鄭明采)·강용상(康龍祥)·장창식(張昌拭)·김창건(金昌健)·장창식(張昌拭)·김이순(金利淳)·김두칠(金斗七) 등과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가 2월 10일 선천(宣川)에서 열린 평북 장로회 노회(老會)에서 양전백(梁甸伯)으로부터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계획을 듣고 난 직후 계획되었다. 유여대는 2월 17일 양실학교(養實學校) 교사인 김두칠와 정명채에게 거사에 대해 협의하고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의 독립선언서가 28일까지 도착하지 않을 것에 대비하여, 우선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김두칠·정명채와 서부동(西部洞) 정신환(鄭信煥)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3백여매를 등사하여 이원익(李元益)·김창수(金昌洙) 등에게 평안북도 도청·경찰부·기타 관청에 배포하게 하고, 거사 일시를 서울에서와 같이 3월 1일 오후 2시로 결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읍내 서부교회에 8백여명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대형 태극기 2개를 교회에 세워놓고 종이로 만든 백여개의 작은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시 30분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자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에 사는 김병농(金炳 ) 목사가 조선독립을 위한 기도를 하고, 유여대가 마침 도착한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는 식이 끝나자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은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려 감히 제지하지 못하고 길가에 도열하여 경계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1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2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그는 출옥 후에도 의주지방에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군자금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는 신간회(新幹會) 진천지부장(鎭川支部長)으로 활약하며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76∼87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6권 4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62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지훈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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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인물
    시기: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