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진
1895.01.05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삼선동3가(현 보문로29길 103)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서 오동진과 함께 사령부 제2영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에는 국내진공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압록강 연안에 설립된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다. 평안남도 경찰국과 선천경찰서 폭탄투척에 성공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1926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44년에는 잔칫집에서 일본의 패전을 강조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삼선동
  • 윤하진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尹河振
  • 이명칭: 尹河震, 尹學昇, 尹河範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70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3가 55번지 (보문로29길 103)
  • 비고: 서울 城北 삼선3가 50

근거자료 원문

  •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9년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만주로 피신하여 오동진(吳東振)·장덕진(張德振)·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廣濟)청년단을 조직하고 중심인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남북 만주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립운동 무장단체들이 모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총영장인 오동진을 보필하였다. 1920년 8월 14일(음)에는 장지환(張志煥)·조태환(趙泰煥)·이성찬(李成贊)에게 무기를 휴대하고 입국토록 하여 윤용섭(尹庸燮)등으로 하여금 광제청년단 지단(支團)을 조직하도록 하였으며, 친형인 하범(河範)이 청성진(淸城津)주재소원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사살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의 앞잡이인 옥산(玉山)면장 김인서(金麟書)와 밀정 이준형(李俊炯)을 총살하였다. 1920년 8월에는 부하 이학필로 하여금 선천군청에 폭탄을 투척하게 하였으며, 동년 9월 1일에는 선천경찰서에 임용일(林龍日)이 폭탄을 던지도록 하였다. 1924년에는 변론자치회(卞論自治會)의 대표로서 정의부(正義府)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1926년에 장춘(長春)에서 신의주경찰에게 체포되어, 친동생인 윤학소(尹學昭)는 1927년 11월경 옥사하였으며,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구형받았으나, 법정투쟁 끝에 1929년 9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6면 고등경찰요사 118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263·537·895·93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2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583·584·586·588·589·594·596·91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5면 동아일보(1926. 10. 26, 1928. 8. 25, 9. 15, 12. 6)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 일제강점기 광복군 사령부 제2영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의주 출신. 일명 학승(學昇). 1919년 3·1운동 후 오동진(吳東振)·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과 독립운동단체인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각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20년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임시정부산하의 광복군 참리부(參理部)와 사령부로 편성되고, 사령부 밑에 각 지방에 군영이 조직되자, 오동진과 함께 제2영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국내진공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압록강 연안에 가까운 지점인 관전현 안자구(寬甸縣安子溝)에 광복군총영이 설립되고 총영장에 제2영장 오동진이 취임함에 따라 광복군총영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이 중국을 거쳐 내한하게 되자, 이 기회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총영장 오동진과 협의, 3개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신의주역·선천군청·선천경찰서·평안남도청을 폭파하도록 하여 평안남도경찰국과 선천경찰서에 대한 폭탄투척이 성공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3년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중국의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1926년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44년에는 잔칫집에서 일본의 패전을 강조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4·5·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73·1975)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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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김진흠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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