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화
1907.01.12 - 1995.01.10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혜화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경성콤그룹 학생부의 비합법 독서회에서 이론을 지도했다. 1941년 성북정 하숙집에서 경성콤그룹의 김한성으로부터 혁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의뢰받았는데, 경성콤그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체포되었다.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했고, 북한으로 가서 평양민보 주필,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월남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일했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혁신계 엄단조치에 의해 1962년 구속, 1964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성북동
  • 이동화 사진
  • 이동화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東華
  • 이명칭: 木子東華, 두산(斗山), 만근(萬根)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86-5번지 (성북로 41-14)
  • 비고: 서울 성북(城北) 186-5

근거자료 원문

  •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재학 중 독서회에 참여하여 국제정치와 외교, 경제 문제, 사회주의 사상 등을 연구하고, 1936년 3월 졸업 후 귀국하여 1938년 1월 서울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교수로 부임하였다. 1940년 4~6월경 조재옥(趙載鈺)의 권유로 독서회에서 신사회 건설 등에 관한 이론을 지도하였다. 이 독서회는 1939년 김단야(金丹野)의 지도로 이관술(李觀述)·이순금(李順今) 등이 조직한 ‘무명(無名)의 결사’가 1940년 3월부터 확대 발전된 비밀결사 ‘경성콤그룹’ 산하 학생부(學生部)의 하부조직이었다. 경성콤그룹에서 학생부를 담당하고 있던 조재옥은 1939년 10월경부터 윤명의(尹命儀)·조희영(趙僖英) 등과 함께 비합법 독서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동화에게 그 이론적 지도를 의뢰한 것이었다. 1941년 4월경 서울 성북정(城北町) 하숙집에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김한성(金漢聲)으로부터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의뢰받았다. 김한성 역시 당시 경성콤그룹 가두부(街頭部)에서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이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활동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에 이동화는 건강상의 이유로 제일선에서 활동하는 것은 무리라서 외곽에서 이론적 연구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김한성은 이동화에게 중일전쟁(中日戰爭)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당면한 국제정세의 추이를 거론하면서, 유럽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는 소련이 승리할 것이므로 이러한 정세에 호응하여 서울의 지식인층도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9~10월경부터 경성콤그룹에 대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체포되었다. 오랜 고문·취조의 기간을 거친 후 1943년 10월 25일 예심이 종결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육해군형법(陸海軍刑法) 위반’으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거의 1년 만인 1944년 9월 27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형사소송법(刑事訴訟法) 제362조에 따라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예심종결결정문(豫審終結決定)文(경성지방법원:1943. 10. 25)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44. 9. 27) 피의자신문조서(被疑者訊問調書)(경성종로경찰서:1941. 10. 2, 1942. 2. 15, 7. 3, 7. 6) 구류장(拘留狀)(경성종로경찰서:1941. 10. 2) 차압조서(差押調書)(경성종로경찰서:1941. 10. 2) 한국일보(韓國日報)(1987. 2. 11) 명인옥중기(名人獄中記)(이동화 외, 1966) 175~196면 검은 역사의 증인들(박대희 편, 1977) 212~233면 이동화평전(김학준, 1987) 99~130면 어둠이여, 횃불이여(김상현 편, 1985) 171~187면 두산(斗山) 이동화평전(김학준, 2012) 137~183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 평안남도 강동(江東) 출생. 1936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문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부터 혜화전문에 재직하면서 항일 지하써클을 지도하다가 1941년에서부터 1943년까지 좌익지하운동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를 지냈다. 같은 해 북한으로 가서 조만식의 <평양민보> 주필을 거쳐 1946년 조(朝)·소(蘇) 문화협회부위원장을 지냈고, 1947년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으나, 그 무렵 북한공산체제에 회의를 느끼고 1950년 6·25전쟁 때 월남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일하였고, 1952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53년 한국내외문제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55년 국방대학원 고문교수를 겸임하였다.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 1957년 민주혁신당 정치위원 및 정책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진보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1959년 무죄 방면되었다. 1959년 동국대학교 도서관장에,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였다. 1961년 통일사회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며 혁신계 전면 엄단조치에 의해 1962년 구속되었다가 1964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2년 대중당 대표최고위원 권한대행과 민족통일촉진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81년 민주사회당 고문, 독립동지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민주사회주의연구회를 창립하고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86년 여운형탄생1백년기념사업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표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작금(昨今)의 내외 정세와 한반도 통일』(1985), 역서 『볼셰위즘 정치 이론의 비판』(1953) 등이 있다. 참고문헌 『이동화 평전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김학준, 민음사, 1987) 『참여와 저항의 두 개의 초상 류달영·이동화』(김종찬, 민족지성, 1986) 「독립·통일 운동의 노선배님들 -두산 이동화 선생-」(남재희, 『정치인을 위한 변명 -한 낙관적인 정치평론가의 기록-』Ⅱ, 행림출판, 1984)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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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김진흠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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