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1903.09.01 - 1981.05.17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정치인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24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 김구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체신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신민당 운영위원,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이었다.
장위동
  • 장기영 집터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03.09.01 - 1981.05.17
  • 비고: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는 생년월일이 1904년 9월 1일로 표기되어 있으나, 1973년 8월 11일자 경향신문의 기사를 통해 1903년 9월 1일에 출생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주소

  • 주소: 02747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246-396번지 (장월로9가길 26)
  • 비고: 서울 城北 長位 246-396

근거자료 원문

  • 강원도 영월(寧越) 사람이다. 1924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창호(安昌浩) 김 구(金九)의 권유를 받고 도미(渡美)하여 버지니아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2년 겨울 그는 이승만(李承晩)의 부름을 받고 미국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서는 미국과 일본 양국간의 전쟁이 확대되자 위원부 직원을 보강하여 새로운 활동을 전개함과 함께 한 미 공동 전투 활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한 미 작전에 의한 재미 한국 청년들의 전투훈련 및 참전을 미국측에 제안하여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위원부에서는 그를 비롯하여 장석윤(張錫潤) 조종익(趙鍾翊) 피터 김 등 청년들을 미 국방성 전략정보처(OSS)에 추천하여 정보 통신 등을 특수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체신부장관, 서울 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9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807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 호는 석정(石正). 강원도 영월 출신. 러시아 자유시에서 무장독립부대 통합을 위해 조직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였다. 그 해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김구의 권유를 받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버틀러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인디애나주립대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며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2년 겨울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봄 구미위원부는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확대되자 한미공동전투활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그를 비롯한 재미한국청년들을 미국방성 전략국(OSS)에 추천하여 정보·통신 등 특수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동안 충칭(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8년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해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49∼1952년까지 체신부장관, 아시아반공대회 한국대표(1956∼1960),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사장(1957∼1960), 서울특별시장(1960) 등을 지냈다. 그 뒤 정당활동을 재개하여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 1971년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를 지냈다. 저서는 『우익정당의 단합론』·『우익정당의 갈 길』이 있다. 1990년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역대삼부요인총감』(대한민국공훈사발간위원회편, 광복출판사, 1986) 『독립유공자공훈록』5(국가보훈처, 1986) 『역대국회의원총람』(한국국회인물사편찬회, 조세공론사, 1983) 『동아연감』(동아일보사, 1972) 『한국공산주의운동사』1(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장기영(張基永)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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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김진흠
  • 작성일: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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