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4월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에 뜻을 두었다.
1939년 10월경 서울 종로구(鐘路區) 성북정(城北町) 자신의 하숙집에서 윤명의(尹命儀)·조희영(趙僖英)과 회견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신사상을 연구하고 1940년 9월 경성콤그룹에 가입하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건설을 위한 실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7월경 김한성(金漢聲)의 집에서 그에게 독소전(獨蘇戰) 발발 후의 정세에서 일소개전(日蘇開戰)은 필연적이므로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기관지 발행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조재옥은 1943년 10월 25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계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폐결핵으로 병보석 되었다. 1944년 7월 1일 오후 6시경 북청읍(北靑邑)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豫審終結決定(京城地方法院:1943. 10. 25)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44.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