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 국민주택단지
1962
장소 거주지
1962년부터 성북구 장위동 일대에 형성된 주택단지이다. 국민주택은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금 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해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으로, 단독형으로 조성되었다. 대한주택공사(1962년 설립)가 발행한 『대한주택공사 주택단지총람(1954-1970)』을 보면 방이 두 개 이상이며, 욕실의 설치와 화장실을 실내로 들여온 것이 국민주택의 주된 특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엌은 재래식이어서 거실과 연결되지 않고 별도의 실(室)로 구성되었다. 국민주택단지 조성 지역에서 많은 건축물이 다세대나 원룸형으로 바뀌고 있으나, 아직까지 단층 주택으로 외벽과 지붕을 개량하면서 주거기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곳도 발견할 수 있다.
장위동
  • 지적도 : 구 상월곡동 7-33번지 일대, 1969년
  • 지적도 : 장위동 66-107번지 일대, 1978년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거주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국민주택단지 대한주택공사(1962년 설립)가 발행한 『대한주택공사 주택단지총람(1954-1970)』의 자료를 살펴보면,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는 네 곳의 재건주택, 부흥주택, 국민주택 단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경춘선이 청량리~성북~신공덕~화랑대를 거쳐 춘천방향으로 향하는 철도 노선이었고, 장위동은 성북역 근거리에 있었기에, 다른 외곽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통이 유리한 지역으로 인지되고 있었다. 신공덕역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가까웠고, 화랑대역은 육군사관학교 앞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에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되고 있었고, 한양도성 외곽으로 꾸준히 주거지역이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각 주택의 명칭은 자금의 조달 방식에 따라 불리던 사업의 명칭에서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국 원조주택이 지어지던 당시 3종 세트로 흔히 묶여 불리던 주택이 있었으니 재건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이 그것이다. 재건주택 역시 원조 자금이 바탕이 되었지만, 직접 원조 대신에 입주자가 공사비의 20% 정도를 먼저 부담하고 나머지는 5~10년에 걸쳐 상환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희망주택 역시 9평의 꿈을 부추겼다. 집 지을 땅값이며 공사비를 모두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는 대한주택영단에서 배정해 공급한 분양주택이 곧 희망주택이다. 부흥주택이란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시행되는 주택 건설 사업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 주로 7회와 8회에 발행된 산업부흥국채 일부를 주택건설자금으로 삼아 공급한 주택을 특별히 ‘부흥주택’이라 부른다. ― 박철수, 『박철수의 거주박물지』, 도서출판 집, 2017, 78~79쪽. 1956년까지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약 3,000여호에 이르는 주택이 공공 분야 주도로 공급되었다. 재건주택은 정부계획에 의거해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원조하는 자재및 자금으로 건설 · 관리하는 주택을 말하며, 부흥주택 · 국민주택은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금 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해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이다. 또 희망주택은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에 한하여 영단에서 배정, 분양하는 주택을 말한다. ―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372~373쪽. 월곡동 일부가 주택사업부지에 포함되어 장위동에는 1958년에 부흥주택과 재건주택,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국민주택 사업이 진행되었다. (199쪽 표 참조) 『대한주택공사 주택단지총람(1954-1970)』에는 1958년 성북구 장위2동 68번지 일대에 총 371세대의 주택이 지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재건주택은 9평형 200세대 100개 동이 지어져 2세대가 1개동을 사용하는 2호 연립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부흥주택은 18개 유형 171세대 43개 동이 지어져 4세대가 1개 동을 이루는 4호 연립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의 구역은 현재의 위성지도에서도 구역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앞의 총람에 실린 항공사진을 보면, 각 주택의 형태와 단지의 규모를 짐작하기가 쉽다. 장위동 부흥주택은 단지의 조성과 연립 주택의 배치, 재료의 사용 등이 1957년 지어진 홍릉의 부흥주택과 매우 유사하다. 1950년대 말은 전후복구 및 재건의 시기로, 건설 재료의 수급이 쉽지 않았고, 원조를 통한 자금과 재료의 조달을 통해 대량으로 주택을 보급하기 위해 지어졌기에, 신축 이후 수십 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증축과 개축 행위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서울 동북부에 조성된 부흥주택은 외벽의 마감과 동 배치와 규모 등 대량 생산 주택의 시대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총람에 1958년에 지어진 부흥주택의 평면은 수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단위 주택단지의 경우 비슷한 시기의 다른 지역에도 다수의 주택단지가 조성이 되어있어, 그와 관련된 기록물을 통해 건축물 내부 공간 구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97-200쪽
  • 홍릉의 부흥주택은 1957년 원조를 받아 지어졌다. 이 단지는 남북으로 형성된 대로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의 4호 연립으로 길게 만들어졌다. 확장과 증축을 통해 연립동 사이의 길까지 연결되어 8호 연립의 형태로 변형이 되었다. 건물 정면에 대문을 두고 양쪽으로 화장실, 창고, 계단을 설치하여 외관상 벽이 형성되었으며, 2층 대부분은 1층 지붕 부분을 확장해 발코니 형태로 사용되고, 셋방을 두는 경우가 많아 복도와 공용공간을 마련했다. 측면은 박공 형태를 유지하며 측면으로 대문을 설치하였으며, 외벽은 백회에 돌을 박아넣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2012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청량리-일탈과 일상』, 2012, 147, 153쪽. 홍릉 부흥주택의 원형 구성도와 건축적 변화 양상을 참고로 장위동의 부흥주택 구역을 살펴보면, 유사한 형태와 재료가 사용된 주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장위동에 1958년에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이 들어서고, 이 구역의 남쪽과 서쪽으로 국민주택 단지가 추가로 들어섰다. 돌곶이역 교차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화랑로는 1976년 6월 26일 방사2호선의 이름을 바꾸면서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이 길은 조선시대 이후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가로京元街路로 혜화문 밖에서 의정부와 춘천으로 연결되던 길이었다. 노원구 공릉동에 육군사관학교가 있고,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인 화랑대花郞臺에서 도로의 이름이 붙여졌다. (『서울지명 사전』, 2009.2.13.) 화랑로와 인접한 북쪽에서 장위초등학교(1946년 분교로 개교, 1949년 국민학교로 승격)의 남쪽까지 전후 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주택단지 조성 이후 1972년에 단지의 서쪽에 월곡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부흥주택, 재건주택, 국민주택 단지는 장위초등학교와 월곡초등학교 사이에서 화랑로 북쪽까지 넓은 구역에 단지 구획을 가지고 있다. 주거지역에는 골목형 시장인 장위골목시장이 부흥주택과 재건주택 단지에 붙어 형성되었고, 1972년에는 건물형 장위시장이 개설되었다. 1962년부터 지어진 국민주택은 장위동의 남쪽 경계인 화랑로에 인접하여 단지가 형성되었고, 1963년에 들어선 국민주택은 언덕과 경사지에 자리잡았다.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은 연립형이고, 국민주택은 단독형으로 조성되었는데, 개별 필지와 건축물이 대부분 재건축으로 멸실되어 남아있는 주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연립형 부흥주택과 재건주택 지역은 2019년 전통시장 연계형 도시재생 시범사업에 선정이 되었지만, 골목형 시장 주변으로 철거 예정 구역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00-204쪽
  • 국민주택단지 조성 지역에서 많은 건축물이 다세대나 원룸형으로 바뀌고 있으나, 아직까지 단층 주택으로 외벽과 지붕을 개량하면서 주거기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곳도 발견할 수 있다. 국민주택의 경우 총람에 각 평형의 평면들이 수록되어 있어, 대량으로 지어진 주택단지의 공간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방이 두 개 이상이며, 욕실의 설치와 화장실을 실내로 들여온 것이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엌은 재래식이어서 거실과 연결되지 않고 별도의 실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주택개량 사업은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위생을 도시 인프라와 생활환경 등과 함께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국민주택은 블록구조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졌다. 단열 등의 효과와 지붕 개량 등을 하면서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집은 거의 없으나, 현관과 창호, 집의 규모와 마당 등 단독형 주택으로 지어졌던 특징이 일부 남아있는 주택에서 확인된다. 장위동 국민주택 단지 구역에서 원형에 가깝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몇 개의 주택은 지역의 도시발전사와 주택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이므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대량으로 지어진 주택단지는 재료와 시공방법에 있어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는데, 1950년대는 전후복구가 한참 진행되던 시기로, 주택 공급을 위한 재료와 시공방법의 개발과 적용에서 고군분투했던 대한주택영단(현 LH)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1958년 이후부터 시멘트생산이 본격화됨에 따라 영단(대한주택영단)은 흙벽돌 대신에 최초로 시멘트블럭을 사용, 정릉에 2층 연립주택을 건설하였으며, 그 후 우이동 국민주택 건설시에는 보통블럭보다 견고한 증기 압축식 블럭을 사용했다. 영단은 또한 일부 국민주택 지붕은 시멘트기와 대신에 석면슬레이트를 사용했으며 이보다 앞서 내벽에는 석탄가루를 섞어 만든 아스벽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때에 건설된 주택의 외부 마감은 시멘트 몰탈을 바른 위에 안료를 섞은 시리콘 방수액으로 뿜칠했다. 그리고…(후략) 또한 건물의 외관에 있어 외벽도 시멘트 몰탈 뿜칠과 적동와를 조화시켰고 지붕재료로는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산이 가능한 재료로 한국슬레이트에서 개발 생산한 슬레이트기와를 사용케 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붕 구배를 완만하게 할 수 있었고 모양도 현대적인 감각을 내게 되어 재래 것보다 세련되었고 건물 모양도 요철로 다양하게 했다. 국민주택은 이밖에도 많은 새 재료를 사용했는데 새로운 재료로는 1958년 정릉 국민주택을 건설할 때 온돌석 대신 최초로 신안재료인 온돌판(시멘트제품)을 사용하기도 하고 우이동 국민주택에서는 마루천정을 문화벽으로 시공하기도 했다. (중략) 국민주택은 재료 시공면에서도 커다란 혁신이 있었지만 설계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었다. 평면상으로 볼 때 넓은 마루방을 리빙룸으로 만들어 주택의 생활공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했고 또한 해방후 처음으로 욕실을 설치하였으나 침식분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엌도 한 단 떨어뜨린 재래식(부뚜막식)이었다. 이러한 부엌은 주택개량상으로 봐서는 일보후퇴를 의미했으나 그때만 해도 중류생활의 주부들은 그것을 원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민주택은 평면에 많은 연구를 한 주택이었으며 특히 1961년도에 답십리에 건설한 9평 주택은 좁은 공간을 가장 유효하게 처리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대한주택공사, 1979, 357~358쪽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04-2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장지희
  • 작성일: 202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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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장소
    시기: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