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1879.08.21 - 1955.06.01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교육가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차미리사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교육 구국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가이다. 1900년대 초 외국 유학을 떠난 신여성으로,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여성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에는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를 통해 '돈암동 117-1'번지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돈암동
  • 차미리사 사진
  • 차미리사 집터
  • 차미리사 흉상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79.08.21 - 1955.06.01
  • 비고: 생년월일은 덕성여자대학교 홈페이지의 설립자 소개에서 확인하였다. 음력 날짜이다.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생년월일이 1880년 8월 21일로 표기되어 있다. 연구자 한상권에 따르면 차미리사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1878년, 1879년, 1880년 세 개의 주장이 있다.

주소

  • 주소: 02840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11-5 (북악산로 918)
  • 비고: 서울 敦岩 117-1

근거자료 원문

  • 서울 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선진문화를 습득하고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5년부터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활동을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유홍조, 이병준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조직하였다. 대동교육회는 국망을 예견하고 해외에 나와 있는 한인들끼리 나라를 구하는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교육기관이었다. 대동교육회는 북미 파사디나에서 조직되었으며 장경희가 회장을 맡은 단체였다. 그는 대동교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동교육회가 대동보국회로 발전할 때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대동신문의 발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7년 미국선교회에서 파견하는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培花學校) 교사와 사감(舍監)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으면서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 당해 봤지. 나 한 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다 살게 아닌가!"를 역설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3·1 운동 이후에는 조선여자교육회(朝鮮女子敎育會)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조선여자 교육회는 여성의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1920년 1월에 조직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배화학교 사감을 그만두고 예배당을 빌려 여자야학을 실시해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에 헌신하였다. 또한 근화학원(槿花學院) 설립에 참여하였으며,『여자시론』이란 잡지를 발행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전국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차미리사는 무궁화를 사랑해서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교정에 무궁화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자수시간에도 무궁화를 수놓도록 했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해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在美韓人50年史(김원용) 89面 東亞日報(1921. 2. 21, 3. 14, 3. 27, 5. 2, 5. 19, 5. 21, 7. 10, 7. 16, 7. 17, 7. 19, 7. 21, 7. 25, 7. 27, 8. 8, 11. 8, 1927. 4. 27) 祖國을 찾기까지(최은희) 中卷 74, 142∼144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51面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진흠
  • 작성일: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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