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1893 - 1978
인물 개인 학자
인물 개인 정치인
국어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내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으며 1948년에 월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조선어 임자씨의 토」, 「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 「짓말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29년 결혼 후 약 10년 동안 숭례초등학교 부근인 종암동 40번지에서 거주하였다.
종암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40번지

근거자료 원문

  •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등을 역임한 학자. 국어학자, 정치인. 내용 경상남도 의령 출신. 호는 고루.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북한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및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및 박사,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한편,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월북 전 주요논저로 「조선어 임자씨의 토」(1935)·「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1936)·「짓말에 대하여」(1937) 등과 『실험도해 조선어음성학』(1947)·『고투 40년』 (1947)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이극로
  • (전략) "경마장 다음 정류소"는 지금의 안암역이며, "영도사"는 지금의 개운사다.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다. 개운사에서 출발해 고려대 안암학사 쪽 출입문으로 들어간 뒤 한적한 대학 둘레길을 따라 걸어간다. 내리막길 왼쪽으로 숭례초교 가는 동네 입구가 나오고 그 길로 곧장 가면 막다른 곳에 에덴 떡 방앗간이 보인다. 그곳을 포함해 왼쪽 4개 건물과 오른쪽 1개 건물 공간이 바로 이 극로가 살던 종암동 40번지다. 개운사에서 이곳까지 도보 30분이 소요된다. 토지는 세월이 흘러 8개 필지로 쪼개졌고, 각각 건물이 신축되어 옛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이 극로는 독일 유학을 마친 뒤 1929년에 귀국했다. 조선어학회 활동을 위해 서울의 여관을 전전하다가 그해 12월 결혼 후 성북구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성북구에 정착한 이유는 임남보통학교(강원도 통천군 소재) 교사였던 부인 김 공순이 1932년에 종암동 숭인보통학교(지금의 숭례초교) 교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이 극로는 경남 의령 출신이지만 종암동에 애착이 많았다. (후략)

기술통제

  • 작성자: 장지희
  • 작성일: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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