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萬恒 1249(고종 36)∼1319(충숙왕 5)
고려말의 고승. 조계산 修輝社 제10세 국사이다. 성은 朴, 본관은 態津, 進士 景升의 아들로 儒家의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어, 九山選에 응시 장원하였으나 名利를 버리고 금강산·지리산으로 다니면서 한벌의 옷만을 갖추고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굽지도 않고 수도에 전념하였다. 충렬왕의 명을 받고 三藏社에 머물렀고 후에 朗月社·雲興社·禪源社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經文을 지도하고 교수하였는데, 제자가 700인에 이르렀고 사대부로서 진사가 되어 入社한 자도 많았다. 吳나라의 화상 德異는 만항의 글과 偈頌을 칭찬하여 古潭이라는 호를 주었으며, 수십차례 서간과 게송을 주고 받았다. 1313년(충선왕 5) 왕이 永安宮에 고승들을 모아 날마다 불법을 강론하게 하였을 때, 그를 극진한 정성으로 초빙하여 禪法을 강설하게 했으며, 충숙왕으로부터 ‘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의 법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가사와 의복, 銀 50근을 보시받았으나 松廣寺로 돌아와서 모두 절에다 내놓았다. 1319년 8월 18일 대중이 보는 앞에서 禪床에 올라 臨終偈를 남기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미소하며 입적하였다. 이때 나이는 71세, 법랍 58세였다. 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慧鑑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搭號를 廣照라 하였다.
성북구 보문동 3-51에 위치한 彌陀寺는 1047년 惠居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1314년(충숙왕 원년) 慧鑑國師가 2차로 重修하였다. 이절은 현재 比丘尼들만의 수련도장으로 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0-7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