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양복점
장소 상업시설
성북구 종암로21길 3(종암동 70-1)에 위치한 양복점이다. 진흥양복점 홈페이지에는 "자유당 말기 전차가 다니던 시절 종로 3가 유일라사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장인정신의 혼이 담긴 손바느질 명품양복만을 고집해 온 양복기능사 1급의 명장의로 성공한 손바느질 양복점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먼저 서소문에서 가게를 열었다가 부도가 난 후 1976년 종암동에 들어왔다. 사장님은 한국맞춤양복기능경진대회, 소상공인기능대회, 한국섬유패션 등에 참가해서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상의와 하의, 그리고 마무리를 하는 분업화 공정으로 네 분이 함께 일하고 있다. 한국맞춤양복협회 동북4구에 속해 있던 수많은 가게들이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양복점이라고 한다.
종암동
  • 진흥양복점 가게 정면
  • 진흥양복점 기능사 자격증
  • 진흥양복점 세계주문양복연맹증진대회 심사위원증
  • 진흥양복점의 손바느질된 명품상의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상업시설

시기

  • 시대: 현대
  • 비고: 1970년대

주소

  • 주소: 02804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70-1 (종암로21길 3)
  • 비고: 용진빌딩 1층

근거자료 원문

  • 가게 정문에 붙어 있는 펼침막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상패들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진흥양복점이다. 진흥양복점 홈페이지에서 가게 소개를 이렇게 하고 있다. ‘자유당 말기 전차가 다니던 시절 종로 3가 유일라사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장인정신의 혼이 담긴 손바느질 명품양복만을 고집해 온 양복기능사 1급의 명장의로 성공한 손바느질 양복점입니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장님은 어느 날 멋진 양복차림으로 나타난 고모부에게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고모부가 양복을 만드는 기술자였던 거죠. 이후 고모부를 따라 양복을 배웠던 시기가 위에서 말한 자유당 말기다. 시기로 말하면 1962~63년이 아닐까 사료된다. 종암동에서 자리 잡기 전에 서소문에서 가게를 열고, 아내는 이대앞에서 양장점을 열 정도로 성공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사업경영 능력이 부족하여 부도를 맞고 성남으로 쫒겨났다고 합니다. 서울시가 개발을 목적으로 서울 외곽으로 집단이주를 시켰던 시절 이야기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고 그때 당시를 회고했다. 그래서 당시 종암동에서 재렴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형의 권유로 종암동을 온 게 1976년이었다. 현 위치로 이사를 온 건 1978년이고, 무허가건물을 건물주가 매입을 하면서 2003년에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1945년생인 진성일 사장님은 올해 76세다. 진열대가 모자랄 만큼 많은 상패들이 있었는데 그만큼 도전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한국맞춤양복기능경진대회, 소상공인기능대회, 한국섬유패션 등에 참가해서 대상 등을 수상했다. 상을 받으면서 한국섬유신문 등에 소식이 실리면서 자연스럽게 광고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종암동보다는 대전, 군산, 순천 등 전국에서 양복점을 찾는 손님들이 많다고 한다. 기성복이 잘 나오고 있어 누가 비싼 양복을 맞춰 입을까 궁금했는데 단점이 있는 몸의 체형을 잘 커버해 줄 수 있는 건 맞춤양복 뿐이고 한다. 기성복이 할 수 없는 손바느질만의 기술력이라고 자랑했다. 오바르크를 손으로 하는 등 기계발전으로 수월해진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상의 하나를 만드는 데 4일이 걸릴 정도로 손이 많이 간다고 한다. 수공업을 평생 동안 했으면 먹고사는 일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살아남기가 어렵다고 한다. 한국맞춤양복협회 동북4구에 속해 있던 수많은 가게들이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생존한 곳이 진흥양복점뿐이고 한다. 현재 상의와 하의 그리고 마무리를 하는 분업하 된 공정으로 네 분이 함께하고 있다. 후계자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끔 찾아오는 데 기술이란 것이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어렵다고 한다. 외부로 나가는 것도 재단사를 따로 두어야만이 가능한 일이라서 후계자 양성에 힘을 쏟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했다.

기술통제

  • 작성자: 김진흠
  • 작성일: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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