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준
1894.08.02 - 1944.01.22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교육가
성북동에서 거주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함경남도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내에서 학우회, 재일조선교육연구회 등에 소속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귀국 후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민족의 권익 및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에 “육해군사에 관한 유언비어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고 상고 중 사망하였다. 성북정 195-23(현 창경궁로35다길 55)에 거주하였다.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성북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문석준
  • 문석준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93-28 (창경궁로35다길 55)
  • 비고: 성북정 195-23

근거자료 원문

  • ·성북정 195-23 ·1928년 초 일본에서 귀국하여 경성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신간회 경성지회에 소속되어 민족의 권익을 신장하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 ·1931년 8월 경 김찬(金燦) 등의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관련으로 체포되어 이후 약 2년 간 복역 ·1933년 2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일보사 영업국장으로 활동 ·1944년 1월 22일 오전 5시 경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협심·각기의 증세로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5쪽
  • 문석준(文錫俊)은 본적이 함남 함주군 삼평면 원상리 259번지이었으나 성북정 195-23번지에 거주하였다.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함경남도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8월 4일 오후 8시 함흥천도교구에서 열린 일본유학생강연회에서 「이상과 실현의 모순」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4년 4월부터 1928년 3월까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 즈음 그는 일본에서 학우회, 재일조선교육연구회 등에 소속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초 귀국하여 경성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신간회 경성지회에 소속되어 민족의 권익을 신장하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3년 2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일보사 영업국장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광산 등을 경영하였다. 그는 1943년 4월 중순 경부터 동월 말일까지 함흥에서 친구들에게 “미국으로부터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 등이 미국정부의 원조 하에 조선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금차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귀결될 때에는 반드시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선 조선동포는 그 준비를 하여야 한다. 금차 전쟁이 이 같이 장기화 됨에 미쳐서는 물질이 풍부한 미국의 승리는 필연이다. 그 때에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소위 “육해군사에 관한 조언비어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 그 후 상고 중 1944년 1월 22일 오전 5시 경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협심·각기의 증세로 사망하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9-110쪽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사회주의 계열 이름: 문석준 주소(당시): 성북정 195-23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93-28 비고: 예전 지번 비교 추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7쪽
  • 본적 함남 함주군 삼평면 원상리 259. 주거 성북정 195-23. 광업. 전시상황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944년 신문 중 사망하였다.
  • 본적: 함남 함주군 삼평면 원상리 259 주소: 성북정 195-23 계열과 단체: 시국담 <활동내용>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함경남도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8월 4일 오후 8시 함흥천도교구에서 열린 일본유학생강연회에서 「이상과 실현의 모순」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4년 4월부터 1928년 3월까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 즈음 그는 일본에서 학우회, 재일조선교육연구회 등에 소속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초 귀국하여 경성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신간회 경성지회에 소속되어 민족의 권익을 신장하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8월 경 金燦 등의 조선공산당 재건사건 관련으로 체포되어 이후 약 2년 간 고초를 겪었다. 8월 보성고보 교사에서 쫓겨난 그는 1933년 2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일보사 영업국장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광산 등을 경영하였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하였다. 조 일본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8년 초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43년 4월 중순경부터 동월 말일까지 함흥부 城川町 94번지 1丁目의 韓秉道, 사포정 2정목 409번지 노창식, 성천정 3정목 93번지 李增祚의 집 등지에서 이들 외 수명에게 “미국으로부터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 등이 미국정부의 원조 하에 조선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금차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귀결될 때에는 반드시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선 조선동포는 그 준비를 하여야 한다. 금차 전쟁이 이 같이 장기화됨에 미쳐서는 물질이 풍부한 미국의 승리는 필연이다. 그 때에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소위 “육해군사에 관한 조언비어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 그 후 상고하였으나 1944년 1월 22일 오전 5시 경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협심·각기의 증세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문석준경성지방법원판결문」(1943.10.11.). 「문석준경성복심법원판결문」(1944.2.18.). 경성종로경찰서장, 「신간회경성지회 집회취체상황 보고 」, 『사상에 관한 정보철』 7, 국사편찬위원회 소수. 『시대일보』 1925.12.30. 『중외일보』 1928.3.4. 『매일신보』 1923.8.10., 1928.3.1., 1932.2.5.
  • ○ 독립의 희망을 말한 대가는 가혹한 처벌로 성북동에 거주했던 문석준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 후 경성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며 신간회 경성지회에 소속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1943년 함흥에서 친구들에게 방송에서 접한 소식을 전합니다. “미국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임시정부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 조선의 독립이 실현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국담을 나눈 사실이 발각되면서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돼 숨을 거둡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9쪽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문석준 1894-1944 / 애국장 / 성북동 195-23 거주 1924년 4월부터 1928년 3월까지 동경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며 학우회와 재일조선교육연구회 등에 소속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1928년 초 귀국한 후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며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했습니다. 1933년 2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재직했고 이후 광산 등을 경영했습니다. 1943년 함흥부 성천정에서 사람들에게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귀결되면 조선독립이 실현될 것이니 재선 조선 동포는 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해 체포되었으며 육군해군형법 위반으로 1년 2월을 받고 복역 중 이듬해 1월 22일 눈을 감았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3쪽
  • ○ 민족유일당 신간회와 성북인들 그밖에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 신간회 영덕지회 간사로 활동한 이기석과 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의 장남으로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와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홍기문,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경성고보 교사를 겸하며 신간회 경성지회 소속으로 활동했던 문석준, 신간회 활동으로 식민지 정책의 타도와 총독정치를 배격하다 징역살이를 하게 된 유진희 등이 신간회에서 활동했던 성북인들이자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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