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1861 - 1905
인물 개인 관료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77년(고종14)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정열·설서·수창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한성 부윤,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민영환은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3번지(현 성북구 선잠로71로 추정)에 음벽정이라는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음벽정에는 많은 명사들이 찾아 왔는데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민영환의 별장이었기에 조선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성북동
  • 민영환 사진
  • 조선요리(朝鮮料理) 음벽정(飲碧亭)
  • 음벽정화재(飮碧亭火災) 별실일동전소(別室一棟全燒)
  • 민영환 별장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3 (선잠로 71)
  • 비고: 음벽정(성북정 13번지)

근거자료 원문

  • 1. 성북, 애국의 바람이 일다 ○ 옥새가 사라진 치욕의 그날 시간을 거슬러 1910년 8월 29일로 가봅니다. 그날,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했습니다. 경술년에 나라를 잃는 치욕을 겪었다고 해서 ‘경술국치’라 이르지요. 일본은 한일의정서(1904)를 통해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을사늑약(1905)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정미7조약(1907)을 체결해 군대를 해산시킨 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킵니다. 그 후 계속된 일본의 침략 정책과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이권다툼 속에서 약소국 조선은 결국 무너지게 된 겁니다. 사람들은 통탄했고 일본과 을사오적에 대한 분노는 들끓었습니다. 성북동에 ‘음벽정’이라는 별장을 갖고 있던 대한제국의 관리, 민영환은 을사늑약 이후 자결하고 안중근 의사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합니다. 정미7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군대는 강제 해산 되었으나 군인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에 힘을 쏟습니다. 독립을 향한 긴 싸움의 신호탄이 터진 셈입니다. 그리고 그 투철한 저항의 기록은 ‘성북구’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로부터 차근히 짚어갈 수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9쪽
  • 정의 1861(철종 12)∼1905.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 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검열·설서(說書)·수찬(修撰)·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전환국 총판(典圜局總辦)·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내무 협판·개성 유수·해방 총관(海防總管)·친군연해 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한성 우윤(漢城右尹)·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 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민영환은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尹致昊)·김득련(金得鍊)·김도일(金道一)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上海)·나가사키[長崎]·동경(東京)·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孫炳均)·김병옥(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鄭喬)는 지금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韓圭卨)과 민영환 밖에 없으므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내부 대신 겸 군부 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참정 대신·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민영환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元帥府)의 회계국 총장(會計局總長)·장례원경(掌禮院卿)·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헌병사령관을 등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외무 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 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저술활동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사구속초(使歐續草)』·『천일책(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疏)·차(箚)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민영환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민영환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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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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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벽정
    분류: 장소
    시기: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