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1926.12.02 - 2008.05.05
인물 개인 문인
소설가이다. 본명은 박금이(朴今伊)이며 필명인 ‘경리’는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계산」을 발표하고, 다음 해 「흑흑백백」을 게재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돈암동 셋방에서 정릉동 골짜기 한적인 곳인 768-2번지로 집을 옮겨갔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토지』는 정릉동 집에 살던 1969년부터 집필하였다. 1980년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1994년 8월 15일 탈고한 『토지』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작가들의 창작과 교류를 위한 ‘토지문화관’을 짓고, 대학에서 후학들과 만나며 말년을 보냈다.
돈암동 정릉동
  • 박경리 가옥 담장 벽화(1)
  • 박경리 가옥 정문
  • 박경리 가옥 측면
  • 박경리 가옥 담장(정문 쪽)
  • 박경리 가옥 전경
  • 박경리 가옥 담장 벽화(2)
  • 박경리_노을진 들녘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박경리_우리들의 시간 표지
  • 발도르프 학교 초록달 아침(4)
  • 발도르프 학교 초록달 아침(2)
  • 발도르프 학교 초록달 아침(1)
  • 발도르프 학교 초록달 아침(5)
  • 발도르프 학교 초록달 아침(3)
  • 박경리, 정릉에서
  • 정릉동 박경리 가옥
  • 박경리와 딸(1974)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朴景利
  • 이명칭: 박금이(본명)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26.12.02 - 2008.05.05
  • 비고: 음력 1926년 10월 28일생

주소

  • 주소: 02705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768-2번지 (보국문로29가길 11)
  • 비고: 박경리 가옥

근거자료 원문

  • 한국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대작인『토지』를 쓴 작가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두 눈이 눈깔사탕같이 파아랗고 몸이 하얀 용이 나타난 꿈’이 태몽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구멍지기’라고 혼날 만큼 수줍음 많고, 책읽기 좋아하던 조용한 아이였다.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1945년 남편을 만나 혼인을 하고, 딸 영주를 낳는다. 남편의 근무지인 인천으로 올라와 헌책방을 하며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외국책부터 딱지본 소설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던 책을 마음껏 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교사로 취직을 하게 되어 잠시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남쪽으로 철수하는 마지막 배를 타고 가까스로 흑석동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남편은 직장에 복귀했고, 이 때문에 수복 후 부역 혐의를 받아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서 세상을 뜬다. 좌우대립에 휩쓸려 남편을 잃고 정신적인 피폐함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현실을 잊으려는 듯, 글 속에서 현실의 한恨을 풀듯 글을 쓴다. 육이오에서 나는 강인한 생활력을 찾았다면, 그 후의 인간 문제에 있어서 나는 문학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느낌과 체험은 조금도 작품화 되지 못한 채 문단에 이름을 걸었는데 하여간 모든 가난함이, 설익은 것이기도 했지만, 문학 작업에 밀어 넣은 힘이 되어주었고 그 세계에 들어서게 했던 것이다. - 박경리, 「창작의 주변」- 고향 통영으로 피난을 가 수예점을 열고 어려운 현실을 버텼지만, 고향은 안식처가 되어 주지 못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얼마간 은행과 신문사에 다니며 틈틈이 글을 써서 다니던 은행 사보에 시「바다와 하늘」, 단편소설「전생록」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 무렵 진주여고 선배의 돈암동 집에 세를 살고 있던 친구가 박경리의 글을 선배 남편인 소설가 김동리에게 보일 수 있게 주선을 하였다. 김동리는 박경리가 가지고 간 시 몇 편을 읽고‘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하였다. 당시 문단에 영향력이 있던 김동리는 박경리의 원고를 몇 편 더 읽어보고는 시보다 소설 쓰기를 권하였다. 박경리는 문인들이 자주 가던 다방 ‘문예싸롱’에 다니며 소설가 모윤숙, 박화성 등 문단 사람들과 얼굴을 익혔고, 김동리에게 조언을 얻기도 하였다. 1955년 8월, 김동리는 박경리가 가지고 온 단편「불안지대」를「계산」이라는 제목으로《현대문학》에 추천했고, ‘경리’라는 필명(본명은 박금이朴今伊)도 지어줬다.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올라온 친정어머니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 가장이 되어 돈암동에 식료품 가게를 차려 생계를 잇던 때였다. 스스로 ‘마음도 생활도 온통 가난했다’고 할 만큼 고된 생활이었다. 때로 글이 막히고 풀리지 않을 때면 키우는 붕어가 유유히 곡선을 그리며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여유를 찾았다. 그러던 중 이웃에서 난 불이 번져 집과 가게가 타버리고 말았다. 아들을 사고로 잃고, 연이어 닥친 시련이었다. 근처 한옥집 셋방을 얻었지만 글을 쓸 때면 주인집과 이웃들의 소리에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게 라디오를 틀어놓아야만 했다. 절박함과 결핍, 응어리들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그 긴장감으로 글을 써나갔다. 온종일 글을 쓰며 보내는 내 방 동남쪽 창에선 산밖에 보이질 않고 남서쪽 창에선 빛바랜 붉은 기와 지붕, 블록담 그리고 능선 같은 언덕이 보일 뿐입니다만, 세상일들은 바람에 실리어 내 창문 앞까지 오는가 봐요. - 박경리,「 서문이라는 것」- 1950년대 후반, 청수장 아래 정릉 골짜기에 작은 양옥을 마련하여 이사를 했다. 산이 가까이 있어 산새 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키우는 개들이 마당에서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집이었다. 셋방에서 주변 소음에 시달리며 글을 쓰던 때와 달리, 산골짜기 정릉에서는 복잡한 세상과 번거로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는 다시 경국사 뒤쪽에 있는 768-2번지로 집을 옮겼다. 이 집이 바로 『토지』집필을 시작한 집이다. 그림이나 조각, 수예에도 손재주가 있던 박경리는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설계 도면도 그려보고, 집 구조를 바꾸기도 했다. 이사 후에 서재를 덧대 짓고, 석축을 손수 쌓고, 난간을 만들고, 마당에는 돌을 깔았다. 마당이 넓은 단층짜리 국민주택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동료, 선·후배 문인들이나 원고청탁을 하러 온 기자들이 자주 찾아왔고, 이 집에서 사위를 보고, 첫 손자를 키웠다. 놀러온 벗들이 내 방,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산바람 소리를 듣고 파도 소리 같아서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늘 들으니까 불안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만 … 심산유곡이랄 것은 없지만 지대가 좀 묘하게 되어서 당분간은 판잣집이 들어설 염려도 없고 무슨 명함과 결탁하여 불하될 가능성도 없는 산이 내가 사는 집, 뜰 안에 있어 늦은 밤, 등 너머 절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탁 소리라도 듣는 때면 내 몸이 심산유곡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 박경리,「 어느 날의 망상」- 1950년대 말에 쓴 초기 작품에는 전쟁을 겪고, 남편과 아들을 잃은 자전적인 모습이 글 속에 나타난다. 이 시기 작품은 대부분 1인칭시점으로 쓰여 작가와 등장인물, 독자의 거리가 가까운 특징을 보인다. 이후 단편과 장편 소설을 문학잡지와 신문 등에 꾸준히 발표하고, 동인문학상, 내성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였다. 1959년 2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된 「표류도」에 대해 선배 문인 박화성은‘1인칭소설이지만 작중인물의 개성과 심경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심각하게 묘사하였다’라고 평하였다. 1960년대 들어서며「내 마음은 호수」,「 노을진 들녘」,「파시」등 신문 연재소설과 중단편을 발표한다. 점차 자전적인 글에서 벗어나며 박경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존엄과 생명,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나타났다. 연재소설은 화가가 매회 내용에 맞추어 그림을 그렸는데, 「내 마음은 호수」와「노을진 들녘」은 박고석이, 「파시」는 천경자가 그렸다. 정릉의 이웃이었던 박고석과 함께 작업한 「노을진 들녘」은 작가가 5년 전부터 구상한 소설이라 사전에 20여 회가 나와 있었지만, 마감에 임박하여 완성된 글을 보고 순발력 있게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재를 시작하며‘글에 맞는 삽화를 그리면서도 삽화 나름대로 줄거리를 갖게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박고석은 박경리와 작품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250회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작가와 화가의 교류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1969년 9월《현대문학》에 『토지』연재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경남 하동 평사리부터 만주 벌판까지, 6백여 명이 넘는 인물의 삶과 역사적 사건이『토지』속에 그려졌다. 박경리의 고향 통영은 임진왜란 때 수군 통제영이 있던 곳이고, 고등학교를 다닌 진주는 백성들의 힘으로 폭압에 항거하여 1862년 민란이 크게 일어난 곳이었다. 나고 자란 땅의 역사와 항일정신이『토지』의 바탕이 되었고, 조선이라는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일제의 식민지로, 대한민국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겪은 작가의 삶이 대하소설에 담겼다. 토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를 잡은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 있었어요. … 마흔 여섯부터 지금까지니까 스물네 해를 토지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삶이 지속되는 한 토지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 박경리의 말 -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3만장이 넘는 원고지에 쓰인 『토지』는 5부로 나뉘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연재되었다. 1부는 1972년 9월에 연재를 마쳤고, 2부는 《문학사상》에서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연재되었다. 2부를 연재하던 1973년 딸 영주가 시인 김지하와 명동성당에서 결혼을 하였다. 유신정권 아래 내란선동죄로 7년간 수감된 사위, 그 뒷바라지를 하는 딸과 손자를 어미로서 돌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사위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딸을 대신해 손자를 업고 정릉 집 서재 창틀에 원고지를 놓고 선 채로 글을 썼다. 글 쓰는 것 말고도 그림과 조각에 능하셨다. 바느질과 요리 솜씨도 뛰어났고 농사도 잘 지으셨다. … 결혼 후 온갖 풍파에 부대끼면서 어머니가 대단히 용기 있는 분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좌우 양쪽에서 힘들게 했지만 한 치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의지가 돼주셨다.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면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추호의 주저함도 없던 분이다. - 딸 김영주의 말 - 2부를 탈고하고는 반 년 넘게 펜을 들지 못하였다. 정신과 육체의 힘을 모두 쏟아 부은 작품인 만큼 건강도 많이 상한 상태였다. 원고지 한 장을 쓰려면 그 열 배를 쓰고 고칠 정도로 글쓰기에 엄격했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도 머릿속은 늘 소설 생각이었다. 두문불출하며 정릉 골짜기 안에서 글만 쓰는 생활에 할머니를 따르는 손자는 큰 기쁨이었다. 손자를 업고 시장을 보러 가고, 마실을 다니며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다른 할머니와 다름없었다. 1977년 1월부터 연재를 시작한『토지』3부를 탈고하고, 다음 해인 1980년, 딸과 손자가 사는 원주로 이사를 간다. 치악산 줄기가 보이는 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이사를 간 뒤 처음 두 달은 집 둘레에 돌담을 쌓는 일만 하였다. 원주에서는 바깥과 접촉을 거의 하지 않은 채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마당에서 흙을 만지고, 밭을 일구고, 나무와 꽃을 가꿨다. ‘글 쓰는 일이나 땅을 파는 일을 구분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글을 쓰는 정신적 작업과 땅을 일구는 육체적 작업에 파묻혀 지낸 때였다. 산과 나는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흙을 만지면 숨결이 들어오는 것만 같아요. - 박경리의 말 - 역사, 철학, 문학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한 독서는 박경리가 글을 쓰는데 가장 큰 자산이었다. 습작 시기에 『세계사대계』를 독파하고‘세상에 대해 눈이 열리는 것’같았다고 했을 만큼 이미 책을 통해 시대를 나드는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고 있었다. 소설 속 주 무대인 하동 평사리와 간도 용정을 가보지 않고도 실제 모습처럼 그려낸 힘 또한 독서에서 나왔다. 『토지』에서 최참판 집안의 흥망성쇠를 그린 초반부를 벗어나면, 소설 속 무대가 평사리에서 서울, 간도까지, 역사적으로 격랑을 겪는 우리 민족의 삶을 따라 확장된다. 한 명, 한 명 개성을 지닌 인물이 가정,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풀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대하소설『토지』. 각 인물들의 성격과 역할에 맞게 고민하여 이름을 짓고, 그 시대와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 의 배경과 역사를 기록하며, 지방마다 달리 쓰는 말을 놓치지 않고 문장으로 살려냈다. 1994년 8월 15일,『 토지』의 마지막이 우리나라 해방을 알리는 소식인 것처럼 소설도 광복절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장정을 마친 뒤 박경리는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만들어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짓는다. 자연으로 돌아갈 때 살던 땅과 집을 사회에 돌리고 자 한 생각이 원주 단구동이 개발되며 조금 일찍 실현된 것이다. 다음 세대들의 문화까지 살펴 그들이 자라날 수 있길 원한 박경리의 뜻이 초석이 되어 국내외 문화인들의 창작공간이자 교류공간인 토지문화관이 지어졌다. 단구동 집은‘박경리문학공원’이 되어 집필실과 텃밭을 보존하고, 전시관을 지어 작가 박경리와『토지』를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느 때보다 격동에 휩싸였던 20세기 전후의 우리 민족의 서사를 문학 속에 담아낸 박경리. 생명의 존엄을 누구보다 중요시 하며 글과 자연 속에 살다 간 우리 문단의 거목은『토지』와 함께 아직 살아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80-88쪽
  • 박경리 1926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본명 박금이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 졸업 1955년《현대문학》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계산」발표, 등단 1969년《현대문학》에『토지』연재 시작 1979년 박경리 문학전집 전16권 간행 1994년『토지』(5부 16권) 탈고, 불어판 출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1995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객원 교수, 토지 영어판 출간 1996년 토지문화재단 창립 1999년 토지문화관 개관 2008년 작고 대표작품 『표류도』,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 불신시대』, 『내 마음은 호수』, 『노을진 들녘』『, 파시』,『 Q씨에게』,『 거리의 악사』,『 원주통신』,『 토지』등 상훈 내성문학상(1959), 한국여류문학상(1965), 월탄문학상(1972), 호암상 예술상(1996)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89쪽
  • 대하소설 『토지』를 쓴 소설가이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계산」을 발표하고, 다음해 「흑흑백백」을 게재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필명 ‘경리’도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장편소설 「표류도」로 ‘내성문학상’을 타고, 1960년대 「노을진 들녘」, 「파시」, 「김약국의 딸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에 자리를 잡는다. 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서 정릉동 768-2번지, 정릉 골짜기 한적한 곳으로 집을 옮겨갔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토지』는 정릉동 집에 살던 1969년부터 집필하였다. 1980년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1994년 8월 15일 탈고한 『토지』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작가들의 창작과 교류를 위한 ‘토지문화관’을 짓고, 대학에서 후학들과 만나며 말년을 보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39쪽
  • 소설가. 경남 통영 출생. 본명은 금이今伊.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불신시대」(1957), 『김약국의 딸들』(1962)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였다.
  • 1954년 다시 올라온 서울에서 친구의 소개로 진주여고 선배인 김동리의 부인 김월계를 알게 된다. 김월계를 만나러 돈암동 집에 찾아가던 날, 미리 써 두었던 시 몇 편을 가지고 가서 김동리에게 보였다. 마루에 걸터앉은 채 박경리의 시를 읽은 김동리는 시보다 소설을 써 보라고 권유하였다. 학생시절 썼던 단편 「불안지대」를 고쳐 다시 한 번 김동리에게 보였고, 이 작품은 김동리의 추천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경리’라는 필명과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렸다. 이듬해 8월에는「흑흑백백」이 같은 지면에 실렸다. 이때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돈암동에 작은 식료품점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표류도 (1960), 돈암동에 살 때 구상한 「노을진 들녘」(1961)이 잇달아 내성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받으며 문단 안팎에 이름을 알린다. 1960년대초 돈암동을 떠나 정릉으로 이사를 한 그는 우리 문단에 큰 획을 그은 소설「토지」집필을 시작한다.
  • 박경리 1926~2008 가옥위치 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 수줍음 많고 책읽기 좋아하던 조용한 아이는 1945년 남편을 만나 혼인을 하고 딸을 낳았다. 남편의 근무지 인천에서 헌책방을 하며 좋아하던 책을 마음껏 보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면서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가까스로 흑석동 집으로 돌아왔지만 피난을 가지 못했다. 수복 후 인민군 치하에서 직장으로 복귀한 남편이 부역 혐의로 수감되어 세상을 뜨면서 박경리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고향 통영으로 내려가 수예점을 하며 어려운 현실을 버티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은행과 신문사에 다녔다. 그 무렵 박경리는 당시 문단에 영향력이 있던 김동리를 알게 되었고 김동리는 박경리에게 시보다 소설 쓰기를 권하였다. 1955년 8월, 김동리는 박경리의 단편 「불안지대」를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현대문학』에 추천했고, 경리(본명 금이)라는 필명도 지어주었다. 가장이 되어 돈암동에 식료품 가게를 차려 생계를 잇던 그녀에게 연이은 시련이 닥쳤다. 이웃의 불이 번져 가게는 타버리고 아들은 사고로 잃었다. 1950년 후반 박경리는 청수장 아래 정릉 골짜기에 작은 양옥을 마련하여 이사했다. 산새소리가 들리고 마당에서 뛰어노는 개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산골짜기 정릉에서는 복잡한 세상과 번거로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몇 년 뒤 경국사 뒤쪽에 위치한 768-2번지로 집을 옮겼다. 서재를 덧대 짓고 석축을 손수 쌓고 난간을 만들고 마당의 돌을 까는 등 곳곳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마당이 넓은 이 단층짜리 국민주택에서 박경리는 동료, 선후배 문인들이나 원고청탁을 하러 온 기자들을 만났고, 사위를 보고, 첫 손자를 키웠다. 놀러온 벗들이 내 방,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산바람 소리를 듣고 파도소리 같아서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늘 들으니까 불안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만 …… 심산유곡이랄 것은 없지만 지대가 좀 묘하게 되어서 당분간은 판잣집이 들어설 염려도 없고 무슨 명함과 결탁하여 불하될 가능성도 없는 산이 내가 사는 집, 뜰 안에 있어 늦은 밤, 등 너머 절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탁 소리라도 듣는 때면 내 몸이 심산유곡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 박경리, 「어느 날의 망상」 박경리는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토지』 연재를 시작하였다. 3만 장이 넘는 원고지에 쓰인 『토지』는 5부로 나뉘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연재되었다. 2부를 연재하던 중에는 유신정권 아래 내란선동죄로 수감된 사위와 그 뒷바라지를 하는 딸을 대신해 손자를 업고 정릉 집 서재 창틀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선 채로 글을 써야 했다. 정릉 골짜기 안에서 정신과 육체의 힘을 모두 쏟아 글만 쓰는 생활이 이어졌다. 할머니를 따르는 손자를 업고 시장을 보러 가고, 마실을 다니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박경리의 큰 기쁨이었다. 정릉의 벚나무 정릉 숲 속에 벚나무가 있었다 아이들이 나무를 장대로 두들기고 있었다 손주를 업고 메뚜기처럼 뛰어갔다 버찌 하나 주워 보석같이 샘물에 씻었다 쌔까맣게 익은 버찌 등 뒤 손주에게 주었다 맛있니? 원보야 응 그때 하늘은 어찌 그리 넓었던지 박경리는 1980년 딸과 손자가 사는 원주로 이사를 간다. 바깥과 접촉을 거의 하지 않은 채 글을 쓰는 정신적 작업과 땅을 일구는 육체적 작업에 파묻혀 지냈다. 『토지』는 1994년 8월 15일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격동의 20세기 전후의 우리 민족 서사를 문학 속에 담아내고 생명의 존엄을 중요시하며 글과 자연 속에 살다 간 대한민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의 숨결은 여전히 정릉에 남아있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02-105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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