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고석
1917.02.25 - 2002.05.23
인물 개인 화가
인물 개인 교육가
화가이다.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였다. 1955년 정릉동에 자리 잡고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였다. 박경리, 천승세 등 작가들의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지리산을 다니며 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여 ‘산의 화가’라고도 불리웠다. 1978년 정릉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이사하고, 1983년에는 처남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작품으로는 〈범일동 풍경〉(1951), 〈가족〉(1953), 〈외설악〉(1981) 등이 있다.
돈암동 정릉동
  • 박고석, <정릉골 풍경>, 1960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동소문동

근거자료 원문

  • ‘산의 화가’라 불리는 박고석은 대동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고, 산세가 절경을 이룬 평양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한 모범생이었지만, 중학교 때는 공부보다 수영, 스케이팅, 농구 같은 운동과 영화, 문예잡지를 섭렵하는 한편 미술부 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지냈다. 평양의 모란봉, 보통강, 기자도, 능라도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고, 방학 때면 기숙사를 아틀리에 삼아 데생 연습에 매진, 미술 공모전에 응모하여 실력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선배 화가 길진섭은 자신만만하게 그림을 가져온 박고석의 작품을 날카롭게 비평하고, 데생 지도를 해주었다. 실력을 자만하지 않고 그림 실력을 키워갔지만, 건축을 한 둘째형의 영향과 현실적인 삶을 택하고자 하는 마음에 대학 전공은 건축을 선택한다. 그러나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미술과로 전공을 바꾼다. 졸업 후 일본에서 동창들과 ‘격조전格調展’이라는 단체전을 열고, 1943년 도쿄에서 개인전을 연다. 한때 만화 영화제작소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기도 했는데, 이때 ‘코주부’ 캐릭터를 만든 화가 김용환과 함께 일했다. 해방이 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4후퇴 후 군대에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트럭 짐칸을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전국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고, 서울 명동의 다방 대신 광복동 밀다원, 에덴다방이 예술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박고석은 노점에서 중고 시계를 팔기도 했고, 부산공고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때로 신문에 한 컷짜리 그림을 그려 얼마간 돈이 생길 때도 있었다. ‘너무나 뼈저린 많은 고난’을 겪은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 김환기, 장욱진, 김병기, 정규 등 부산에 내려와 있던 화가나 김종문, 김수용 같은 문학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국립박물관도 광복동 경상남도 관재청 건물로 옮겨 와 있었다. 피난 온 작가들이 전시장이 없어 휘가로다방이나 르네상스다방 같은 곳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보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박물관에서는 ‘현대미술작가전’을 열어 전시공간을 제공했다. 박고석은 김환기, 정규, 이중섭 같은 화가들과 친분이 있고 전시를 주관한 국립박물관 학예관 최순우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1952년 두 번째 개인전을 휘가로다방에서 열고 <가족>, <범일동 풍경> 등 20점을 전시하였다. 또, 그해 겨울에는 르네상스다방에서 한묵, 이중섭, 이봉상, 손응성과 같이‘기조전其潮展’을 개최해 <서울C>, <저울>, <눈 오는 날> 등을 발표하였다. 부산 피난에서 돌아온 뒤 신설동 초가집에 살다가 1955년 정릉동으로 이사를 한다. 약사암 셋방살이 끝에 잘 알던 어른이 땅을 마련해주어 20만 환을 들여 재목材木을 사고,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열 평 남짓한 집을 지었다. 집 주변으로 이백 평쯤 되는 뜰에 꽃과 푸성귀를 키우는 재미가 도시에 살 때는 모르던 자연 속 삶을 즐기게 해주었다. 여름에는 더위를 씻고, 겨울에는 얼음 깬 물의 청량함을 느낄 수 있는 시냇물이 집 옆으로 흘러 식구들끼리는‘자가용 시냇물’이라 불렀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정릉 집에서는 가을이면 그 나름으로 휘황하다고 할 정도로 나무마다 색색 단풍으로 물드는 잎사귀들을 보며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판잣집은 틀림없으나마 제법 내 집이라서 그렇고 뜰이 한 이백 평 남짓하니 아이새끼들의 마음대로 뛰노는 꼴도 제법이요 금년에는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국화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꽃을 즐길 수 있어 십상 좋다. 이리하여 시내에서 쫓겨난 팔자치고는 상팔자로 봄이 오면 살구꽃, 복숭아꽃이랑 제법 흥취를 돋우어 주며 여름철에서 가을까지는 가지, 토마토, 오이, 호박을 비롯한 김장거리까지 싱싱한 야채가 내 손으로 가꾸어지며 이루어지는 재미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 박고석, 「단풍은 무르익고」, 1958 - 정릉 시절 서라벌예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 출강하며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그림을 그리거나 찾아오는 학생을 가르쳤다. 얼마 뒤 고대의상연구가인 아내 김순자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 박고석은 서울대학교 병원 건너편에 있던 원남동 화실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하였다. 정릉 집에는 박고석의 지인들이 머물며 아이들과 가족같이 지냈다. 부산 피난 시절 화가 김병기의 소개로 만난 이중섭은 박고석이 부산공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살던 판잣집에서 같이 지내며, 근교로 스케치를 다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이중섭은 늘 박고석을 찾아왔고, 정릉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중섭과는 둘도 없는 친구인 시인 구상도 자연히 어울리게 되었고, 구상을 통해 고은도 만났다. 오랜 친구인 한묵도 프랑스로 가기 전 정릉에 머물러 인연을 이어나갔다. 이중섭은 부산에서 잠시 나의 집에 있기도 했다. 나는 당시 부산공고에서 일 년 정도 선생을 한 일이 있고, 그때 학교 앞 개천가에 밥집 겸 다방을 하느라고 판잣집을 두 채 지었다. 그 가운데 한 채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다 밥은 같이 먹고 잠은 그곳에서 자게 했다. 그가 이북에서 피난 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그림도구와 개털옷 한 벌뿐이었다. 그는 이부자리도 없이 그 개털옷을 깔고 잠을 자야 했다. 우리 둘은 매일 화구를 들고 변두리로 스케치를 나갔다. 주머니에는 지금 돈으로 오백여 원이 항상 들어 있었다. 점심은 항상 막걸리 한 잔에 깍두기였다. - 박고석, 「명사교류도」- 1957년, 기존 화단의 활동과 다르게 순수한 현대 회화운동을 펼치고자 ‘모던아트협회’를 만들었다. 유영국, 한묵, 황염수, 문신, 천경자들과 1960년까지 여섯 차례 협회전을 열어 현대미술을 선보였다. 이후 1960~70년대에는 김종휘, 박항섭, 정규, 최영림 등과 개성 있는 표현을 중요시하고 미술사조에 얽매이지 않는 활동을 펼친‘구상전具象展’을 이끌었다. 이들은 추상과 구상 사이에 있는 작가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기존의 흐름에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로 전시와 함께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공모전을 열었다. 서구적인 궤적에 대한 동경, 선망이나 동양적인 유산 속에 도취, 자부하는 개념 위에 먼저 절박하고 진지한 현실과 대결하는 용기와 경건한 주체의식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그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풍토와 체질 위에 각기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이며 그 꽃이 찬란하거나 고귀하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간에 각기의 모습과 존재의의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 박고석, 「풍토성과 전통문제 태동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에 부쳐서」, 1958 - 박고석은 같은 뜻을 가진 동료들과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인들과 생각을 나누었다. 명동 목동다방과 광화문 아리스다방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아리스다방에 늘 오던 시인 김수영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겠다고 마포 집에서 닭 두 마리를 잡아 박고석이 사는 정릉 집까지 걸어온 일도 있었다. 일본대학교 선배인 화가 김환기, 이종우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의지하고 지냈으며, 동선동에서 홀로 작업하며 지낸 조각가 권진규는 아끼는 후배 예술가였다. ‘고바우’캐릭터로 유명한 김성환과는 1950년대 정릉에 이웃해 살아 통금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 얘기를 하곤 했다. 처남인 건축가 김수근이 1961년 일본에서 돌아와 우리 문화를 더 배우고자 했을 때는 친구 최순우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우리나라 첫 건축잡지인《공간》과 원서동 공간사옥 지하에 있던‘공간사랑’에서 벌였던 전시, 공연, 낭송회 등 여러 문화활동은 박고석, 최순우, 김수근에게서 시작되었다. 한편, 정릉에서 지낸 시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천승세 「점례와 소」, 이무영의 「계절의 풍속도」, 박경리의 「노을진 들녘」, 홍성원의 「따라지 산조」등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박고석은 삽화에 대해 ‘일종의 주제화라 할까 그림인 동시에 작품의 전개에 따라 변화와 강조를 생각하는 등 하여간에 재미있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짧게는 4화부터 길게는 300회가 넘는 연재소설의 삽화를 날마다 빠뜨리지 않고 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글을 쓰는 작가도, 소설을 읽고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삽화가도 마감에 쫓기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촉박할 때는 기자가 작가의 집까지 찾아가 원고를 받아오거나 작가가 직접 신문사로 원고를 가져다주었다. 정릉 이웃인 박경리가 쓴 「노을진 들녘」의 삽화를 그릴 때는 황달까지 앓아 몸져누울 지경에도 달필로 삽화를 그려냈다. 오랜 활동 기간에 비해 개인전이나 단체전 횟수가 많지 않아 작품을 적게 그리는 작가로 알려졌지만, 늘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신문 연재 소설 작업 초기인 1959~60년에는 김기창, 우경희, 한봉덕들과 삽화가 동인회를 만들어 삽화 전시에 참여했고, 1960년대 말에는 김종문, 강인섭 등 시인이 쓴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 시화전을 여러 차례 여는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박고석이 좋아하는 소재는 ‘자연’이었다. ‘산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산을 좋아하고, 산 그림을 많이 남긴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주말이면 가까이는 북한산, 도봉산, 멀리는 설악산, 지리산을 찾았다. 부산에서 연 개인전 이후 20년 만에 1974년 도봉산과 설악산의 사계四季를 그린 작품으로‘공간사랑’에서 전시를 연다. 산행을 나서는 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 버렸다. 사시사철 가림이 없이 나의 마음은 항시 심산유곡 아지랑이 속을 헤맨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짜임새로 꽉 짜인 자연의 오묘함을 감히 화폭에 옮길 생각은 엄두도 못 낸다. 산은 수려하면 할수록 그 수려함으로 해서 어떠한 저항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 내 나름대로의 우둔한 붓자국을 남기고 싶은 마음. 오늘도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저 당당한 산세 앞에 서서 나 는 허술한 화필로 격한 나의 마음을 달래 본다. - 박고석,「 내가 좋아하는 소재2」- 1978년 정릉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이사한 다음해 도봉산에서 바위를 타다 추락하여 부상을 입고,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다. 몸이 좋지 않았지만 산과 그림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재기하여 네 번째 개인전에서 북한산, 백암산, 내설악, 외설악 등 25점을 발표하고, 고희를 앞둔 1986년에는 신작 15점을, 1994년에는 서울과 부산의 화랑에서 판 화전을 개최한다. 고희를 넘은 나이인 1990년 화업 50년을 결산하는 화집을 내고, 전시를 열며 수채화 신작과 스케치를 함께 발표하였다. 박고석은 한국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지한 정신적 의식을 바탕으로 현실을 보고, 어떤 소재든‘살아 숨쉬는 생물’처럼 느껴지는 작품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화가 자신이 받은 감동을 굵고 활달한 필치로 화폭에 담아 보는 이까지 그 감동과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늘 오르는 산에서도 스케치 할 시간에 산을 보고 느껴야 한다던 그는 1983년 처남 김수근이 설계해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5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화가로 산 그의 그림은 땅 기운을 품은 산이 되고, 꿈틀거리는 산맥이 되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30-38쪽
  • 박고석 1917년 평양에서 출생 1935년 일본대학 예술학부 입학 1940년 동경에서‘격조전’창립 1943년 첫 번째 개인전 개최(동경), 만화영화제작부 근무 1952년 피난지 부산 피가로다방에서 개인전 개최, 르네상스다방에서‘기조전’창립 동인전 개최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전임강사 1956년 서라벌예술대학 미술과장 1967년 ‘구상전’창립 196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자문위원, 대한미술협회 이사 2002년 작고 대표작품 <범일동 풍경>, <바닷가 인물>, <부산>, <소>, <비 온 뒤>, <가지>, <백암산>, <도봉산>, <외설악>, <쌍계사 가는길> 등, 화문집 『그림·글 박고석』 상훈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4), 은관문화훈장(1987)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39쪽
  • ‘산의 화가’라 불린다. 일본대학 예술학부 유학하여 단체전과 개인전을 연 이후, 1950년대 황염수, 이중섭 등과 기조전, 모던아트협회, ‘구상전具象展’을 이끌며 순수회화운동을 펼쳤다. 부산 피난에서 돌아온 후 신설동 초가집에 살다가 1955년 정릉동에 자리 잡고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였다. 박경리, 천승세 등 작가들의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한다.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지리산을 다니며 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한다. 1978년 정릉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이사하고, 1983년에는 처남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9쪽
  • 이중섭과는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났다. 박고석이 살던 판잣집에 이중섭이 머물며 같이 스케치를 다녔고, 박고석, 한묵, 손응성과 함께 <기조전> 전시를 하였다. 이중섭과 절친했던 시인 구상의 소개로 박고석을 알게 된 고은은 1959년부터 2년 간 박고석의 집에 머물렀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이중섭은 늘 박고석을 찾아왔고, 정릉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9쪽
  • 박고석 화백은 ‘산의 화가’다. 화폭에 산을 많이 그리기도 했지만, 그린 작품 수보다 산행을 한 횟수가 수백, 수천 배 더 많다. 구수한 이북 사투리의 ‘산사나이’ 박고석 화백은 온 세상을 품을 것 같은 훌륭한 인품의 멋쟁이로 미술계에 알려져 있다. 행려병자로 객사한 이중섭의 시신을 적십자병원에서 거두어 장례를 치른 것도 그다. 산과 더불어 박고석 화백의 동무, 또 하나를 꼽자면 커피다. 그의 화실엔 언제나 물처럼 마시는 원두커피가 담긴 큰 주전자가 있었다고 한다. 줄담배를 피우면서 늘 원두커피를 물처럼 마신 탓에 평생 속병을 달고 살았다. 평양의 기독교 목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고 공부도 곧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보통학교 졸업 때 70여명의 졸업생 중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답사를 했던 기억과 산과 들을 쏘다니던 어린 시절을 가끔씩 추억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동강을 끼고 자랐고 모란봉을 뒷집 드나들 듯 오르내린 탓인지, 성장해서도 산밑 아니면 산등성이에서 살아온 탓인지 나는 산을 좋아하는 버릇이 생긴 모양이다. 젊었을 때 여름방학이면 절반은 강이나 바다에서 지냈고 일찍이 금강산을 원족하는 등 자연이 좋아서인지 원래의 방랑벽의 소치인지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다.” (1973. 12. ‘세대’지) 이후 부친의 상해 망명으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고 주변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실망감으로 비뚤어진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소질을 발견한 박화백은 마침내 일본대학 예술학부로 그림유학을 떠나기에 이른다. 1930년대 일본 유학 당시 일본 독립미술협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본적 야수파 양식을 습득했다. 사토미 가츠조, 마기시 고타로의 영향이 작품에서 나타나 이중섭, 구본웅과 함게 그를 한국 표현주의 작가라 부르기도 한다. 귀국 이후인 1950년대에 황염수, 이중섭, 한묵 등과 기조전, 모던아트협회, 구상전을 이끌며 순수회화 운동을 펼쳤다. 부산에서 피난해 이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지냈는데, 이때의 대표작이 <범일동 풍경>(1951)이다. 두꺼운 마띠에르의 박고석 화백 특유의 표현주의적 기법이 엿보인다. 범일동은 이중섭 김환기 한묵 등 여러 화가들의 피난지였는데 이들은 모두 피난 생활 중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박화백은 생전에 피난시절 부산 국제시장을 오가며 보았던 시장풍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시계장사라기보다 시계고물상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헌 석유 궤짝 위에 비둘기장 같은 예쁘장한 유리장을 올려놓고 시계라야 고물딱지를 십여개쯤 늘어놓은 꼴이란 지금 생각해도 가관에 속하는 것이었다” (신동아70년 6월호) 서울로 돌아온 이후엔 신설동 초가집에 자리를 잡았다. 성북과의 인연은 1955년 정릉동에 자리잡으면서 부터다. 강의를 나가던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강사 수입이 넉넉지 않았던 터라 박경리 천승세 등 작가들의 신문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일도 했다. 1957년 모던아트협회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그는 1962년부터 6-7년간 붓을 놓았다. 한동안 내적 침잠의 기회를 갖던 박화백은 1967년 다시 붓을 들면서 늘 다니던 산을 평생의 주제로 천착한다.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도봉, 수락, 지리, 설악산 등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며 작품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서도 비교적 그림으로 많이 남아난 것이 백양산, 백암산, 외설악, 북한산 등이고 지리산 자락의 화개마을과 쌍계사 가는 벚꽃 길 등도 즐겨 그렸다. 박고석 화백은 산행 할 때, 여럿이 동행하기 보다는 주로 혼자 다니곤 했다고 한다. ‘산을 제대로 못 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화가에게는 그리는 것 보다는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끔 그의 산행에 동행한 지인은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구릴 시간 이쑤문 더 봐야디. 볼 시간도 부족한데 구릴 시간이 업디….”라며 이리저리 눈으로 산을 살피듯 보면서 머리를 끄덕이던 박고석 화백의 생전 산행(山行) 철학에 대해 회고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선생은 “자연의 존재감이 가슴으로 확인되어지는 경지, 마음으로 만나는 경지야말로 ‘감각의 실현’이라고 한다면, 박고석의 산은 바로 오관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자연의 강도로서 감각의 구체적인 실현”이라고 평가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05-206쪽
  • 박고석 1917~2002 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하였지만 중학교 때는 공부보다 미술부 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지냈다. 선배 화가 길진섭의 지도와 자만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림 실력을 키웠지만 현실적인 삶을 살고자 건축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미술과로 전공을 바꾼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 노점에서 중고시계를 팔거나 부산공고 학생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렸다. 너무나 뼈저린 고난을 겪은 시간이었지만 김환기, 장욱진, 김병기, 정규 등의 화가나 김종문, 김수용 같은 문학인들과 활발히 교류하기도 하였다. 부산 피난에서 돌아와 신설동에 살다가 1955년 정릉동으로 이사했다. 약사암 셋방살이 끝에 잘 알던 어른이 마련해 준 땅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열 평 남짓한 집을 지었다. 집 옆으로는 식구들끼리 ‘자가용 시냇물’이라 부르는 시냇물이 흐르고, 가을에는 나무마다 색색 단풍이 물드는 정릉 집에서 자연 속 삶을 즐기고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산책 삼아 뒷산에 올라 나뭇가지를 꺾어다 때는 맛이란 또한 유쾌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첫째 공짜라서 유쾌하거니와 눈에 덮인 산중이란 교요하기 짝이 없고 자연이 풍기는 서정이 꽉 차 있고 해를 받아 따스하기 그지없으며 맑고 싸늘한 공기 내음새는 시중에서는 도저히 맛보기 힘든 천지에서 ‘삭정이’ 등 나무를 두어 단 하고 나면 그 추운 겨울에도 이마에서 땀이 흐르며 불건강하기만 한 이놈의 몸과 마음이 씻기는 듯 느끼는 바 상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 박고석, 1958, 「정릉리 풍물」 판잣집은 틀림없으나마 제법 내 집이라서 그렇고 뜰이 한 이백 평 남짓하니 아이새끼들의 마음대로 뛰노는 꼴도 제법이요 금년에는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국화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생의 꽃을 즐길 수 있어 십상 좋다. 이리하여 시내에서 쫓겨난 팔자치고는 상팔자로 봄이 오면 살구꽃, 복숭아꽃이랑 제법 흥취를 돋우어 주며 여름철에서 가을까지는 가지, 토마토, 오이, 호박을 비롯한 김장거리까지 싱싱한 야채가 내 손으로 가꾸어지며 이루어지는 재미란 말할 수 없이 좋다. - 박고석, 1958, 「단풍은 무르익고」 아내 김순자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 박고석은 그림을 그리거나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원남동 화실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하였고, 정릉 집은 박고석의 지인들이 머물며 아이들과 가족 같이 지냈다. 화가 이중섭은 늘 박고석을 찾아왔고, 정릉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오랜 친구인 한묵도 프랑스로 가기 전 정릉에 머물러 인연을 이어나갔다. 서구적인 궤적에 대한 동경, 선망이나 동양적인 유산 속에 도취, 자부하는 개념 위에 먼저 절박하고 진지한 현실과 대결하는 용기와 경건한 주체의식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그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풍토와 체질 위에 각기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이며 그 꽃이 찬란하거나 고귀하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간에 각기의 모습과 존재의의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 박고석, 1958, 「풍토성과 전통문제 태동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에 부쳐서」 박고석은 분야를 막론하여 예술인들과 생각을 나누었다. 시인 김수영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겠다고 마포 집에서 닭 두 마리를 잡아 박고석의 정릉 집까지 걸어왔다. 1950년대 정릉에 이웃해 살던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과는 통금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 얘기를 하였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정릉 이웃 박경리와 함께 한 「노을진 들녘」은 황달로 앓아누울 지경에도 그렸다. ‘산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산을 좋아하고, 산 그림을 많이 남긴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주말이면 가까이는 북한산, 도봉산, 멀리는 설악산, 지리산을 찾았다. 산행을 나서는 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 버렸다. 사시사철 가림이 없어 나의 마음은 항시 심산유곡 아지랑이 속을 헤맨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짜임새로 꽉 짜인 자연의 오묘함을 감히 화폭에 옮길 생각은 엄두에 못 낸다. 산은 수려하면 할수록 그 수려함으로 해서 어떠한 저항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 내 나름대로의 우둔한 붓자국을 남기고 싶은 마음. 오늘도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저 당당한 산세 앞에 서서 나는 허술한 화필로 격한 나의 마음을 달래본다. - 박고석, 「내가 좋아하는 소재」 2 1979년 도봉산에서 바위를 타다 추락하여 부상을 입고 한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지만, 산과 그림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았고 재기에 성공하여 작품을 선보였다. “늘 오르는 산에서도 산을 보고 느껴야 한다”던 박고석은 1983년 처남 김수근이 설계해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08-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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