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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필이 방 여사 자매와 사라지자 세 사람이 남았다. 곧이어 한무학도 처자가 있는 집으로 가버렸다. 이제 연희하고 중섭 둘뿐이었다. 박연희도 북쪽 출신이지만 그는 6·25하고는 상관없이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릉에 집이 있고 처자도 단단하게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늘 자리를 빨리 뜨지 못했다. 이석이니 중섭이니 하는 집 없는 떠돌이들과 막역한 사이인 탓에 술자리에서 그들이 남으면 그도 남았다. 나 먼저 간다─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정릉은 피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여러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장르의 경계를 넘어 교류한 곳이다. 이중섭은 1955년 12월부터 이듬해 9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정릉에 머물렀는데, 소설가 박연희(1918-2008)도 이중섭과 가깝게 지냈던 문인 친구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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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돈을 걷었다. 염수와 이석은 걷힌 돈을 중섭에게 주었다. 이번에는 옷부터 반반하게 입고 가야지. 그들은 단단히 일렀다.
"저번처럼 거지꼴로 가문 또 쫓겨난다."
"빤쯔부터 갈아입고."
중섭의 팬티는 너덜너덜 구멍 나고 냄새가 고약할 게 안 봐도 뻔했다.
"정릉 골짜기에 가서 목욕도 하고. 좀 추운가?"
"무슨 정릉 골짜기?"
"아차! 이사했나?"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즐거워졌다, 차차.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생활고가 극심해지자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이를 일본에 있는 처가로 보냈다.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그는 1953년 일본에 건너가서 몇 년 만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남루한 행색 때문에 장모에게 냉대를 받고 금세 돌아왔는데,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하자 다시 가족들을 만나러 갈 생각에 들떴지만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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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와 이석은 기분 좋고 홀가분했다. 이석이 염수에게 말했다.
"염수야, 이거 새거구나?"
전에 본 적이 없던 새로 걸어놓은 나무 그림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응."
염수는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지 짧게 대답했다.
"야, 장미는 햇살이 흐르는데 나무는 왜 이렇게 심통이냐?"
너 성질머리처럼, 그 소리였다.
황염수는 아내 남정인이 쉬는 날이면 둘이서 정릉 골짜기로 들어가서 나무를 그리며 온 하루를 보냈다.
황염수(1917-2008)는 이중섭과 일본 유학시절에 만났고, 그 후 피난지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인연을 이어나갔다. 전쟁 후 돈암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초기에는 산과 나무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장미를 평생의 주제로 삼아 '장미의 화가'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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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섭은 병원에서 퇴원한 뒤 넉 달 남짓 한묵과 함께 정릉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건강이 좋아져 산책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그러나 그림이 잘되지는 않았다. 중섭은 한묵에게 "아무래도 나는 이제 그림을 못 그릴 것 같아" 했고 박고석에게는 "고석아, 좋은 그림 많이 그려. 내가 어디서나 보아줄게"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이중섭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며 1세대 추상화가 한묵(1914-2016), '산의 화가' 박고석(1917-2002)과 가까이 지냈다. 이들 '삼총사'의 우정은 이중섭이 삶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정릉에서도 계속되었다. 박고석이 먼저 정릉에 살게 되었고, 얼마 후 한묵이 근처에 하숙집을 얻었다. 영양부족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이중섭은 돈암동에 있던 성 베드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 후 한묵의 하숙집에 합류하였다. <정릉 풍경>(1956) 등을 그리며 작품 활동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1956년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친구들에게 시신이 인도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고 유골의 일부는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보냈으며, 또 나머지 일부는 박고석이 정릉동 계곡에 뿌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