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조반 숟가락 쥔 채 끌려나가 매 맞아 죽은 빨갱이의 딸, 가수는 커녕 무대 한번 못 서보고 주정뱅이 딴따라 남편에게 매 맞으며 파출부로 행상으로 월셋방 줄여가며 미아리 고개 산다는 유복이가 꿔간 돈 십만 원 때문에 그간 못 왔다며 부조 대신 노랠 불렀다
왜 그렇게 눈은 퍼붓던지
공산주의 <공>자도 못 쓰던 빨갱이의 유복녀, 퉁퉁 부은 만삭의 이모가 유치장서 신음 한번 못 내고 해산하던 그날도 눈발 굵었다더니 유복이 따라온 눈 때문에 환갑 잔치는 더욱 구성지고 미아리 고개는 온종일 꽉 막혔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미아리고개는 첨예했던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미아리고개를 통해 서울로 침투하였고 후퇴할 때에도 그곳을 통해 많은 사람을 납치해 갔다. 또한, 도시 재개발 이전 미아리고개는 낙후된 주거지역 중 하나였다. 이 시에서 이념 대립에 희생된 유복의 부모, 그리고 연좌제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복을 통해 가족의 아픔과 역사의 비극이 동시에 느껴진다. '유복' 이라는 인물의 이름도 여러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