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늘 같은 장소에 있었다
한자리에서 붙박여 있었기 때문인지
사는 게 매일매일 같아서인지
내가 늦되어서 그랬는지
당신에게도 얼굴이 있다는 걸 몰랐다
소년 소녀들이
남자 여자로 바뀌는 신비의 비밀을 간직한 채
당신의 심장은 콸콸 뛰었다
오래 갇혀 맺혔던 물방울들이
떼굴떼굴 굴러 옆구리를 쳐도
당신은 언제나 맑은 물로 출렁거렸다
흉한 시간이 당신의 녹슨 관에서
쓸쓸하게 흘러나왔을 때
푸른색 타일에 새겨져 있던 백조의 얼굴이
희미해져 갔다
부서진 타일 더미에서
조각난 얼굴이 보였다
처음으로 당신을 본 순간이었다
** 시 전문 수록 **
경신고등학교 후문 쪽에 살던 시인은 자녀들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동네 목욕탕, 성암목욕탕을 즐겨 찾았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철거되는 성암목욕탕을 보면서 가졌던 아쉬운 감정을 토로하는 시이다. 여기에서 성암목욕탕은 ‘당신’으로 설정되어, 추억과 그 추억이 담긴 장소에 대한 애틋함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