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문 철거
1928 - 1939
사건 도시
일제가 1928년 동소문의 문루(門樓)를, 1939년 남아있던 동소문의 석문(石門)을 철거한 사건이다. 동소문은 혜화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 4대문의 사이사이에 배치된 4개의 소문 중 하나이다. 혜화문은 원래 석문만 있었다가 영조 때에 문루를 올렸는데,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전혀 관리되지 않아 낡았고, 1928년 문루가 낡았다는 이유로 문루를 헐어 버렸다. 이후 경성(서울)의 확대에 따른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하면서 돈암동까지 전철을 놓게 되었는데, 그 길이 동소문을 지나게 되자 남아있던 석문마저 헐어 버렸다. 동소문은 1994년에 지금의 위치(성북동 1가 1-1)로 복원하였는데 원래 위치는 이미 도로가 되어 있어서 조금 옆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성북동
  • 혜화문(2)
  • 신록(新綠)의 대경성(大京城) 부감기(俯瞰記) (4)
  • 대경성(大京城)의 내일(來日) 위(爲)하야 희생(犧性)되는 동소문(東小門) 간선도로공사착수(幹線道路工事着手)
  • 풍우(風雨) 오백년(五百年)의 노문(老門) 동소문(東小門)은 헐렸다 부근(附近) 일대(一帶) 시가정리(市街整理)로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사건 도시

시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가 1-1

근거자료 원문

  • 3. 日帝下의 城北地域 變化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 4) 東小門(惠化門)의 철거 朝鮮王朝實錄 太祖 5년(1405) 9월 24일 條를 보면 「各門의 月團 樓閣을 지었는데, 正北을 輔淸門, 東北을 弘化門 俗稱 東小門, 正東을 興仁門 俗稱 東大門, 東南을 光熙門 俗稱 水口門, 正南을 崇禮門 俗稱 南大門, 南西를 昭德門 俗稱 西小門, 正西를 敦義門, 西北을 彰義門이라 하였다」고 하여, 40餘里 주위의 都城에는 東西南北의 4大門과 그 사이 사이에 4小門 合8門이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 8개 城門의 규모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없지만 「又作各門月團樓閣」이라고 적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創築 당시 8개門에는 모두 아취와 門樓가 設置되어 通行과 觀望에 좋게 되어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都城 自體도 25년 후인 世宗 4년에 벌써 일대 改築이 있은 것처럼 城門도 대개는 改築이 많고, 위치와 名稱의 변동도 있었다. 都城의 東北間에 있던 小門의 원래 이름은 弘化門이었고 東小門으로 속칭되었다, 興仁之門이 東大門으로, 崇禮門이 南大門으로 불려진 것과 같았다. 그런데 成宗 24년(1493)에 落成한 昌慶宮의 동편문을 弘化門으로 命名한 탓으로 두 개의 弘化門이 있게되어 中宗 6년(1511)에 東小門의 이름을 惠化門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王朝實錄 英祖 20년 8월 庚戌條에 「惠化門은 전에는 門樓가 없었는데 佛營廳에 命하여 건립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惠化門도 門樓가 없이 石門만 있던 것을 英祖 20년 8월에 御營廳에 하명하여 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惠化門 즉 東小門을 나서면 三仙坪·敦岩里·미아리를 거쳐 水踰峴을 지나 議政府에 도달하고 거기서부터 파발막(抱川)-金化-淮陽-鐵鎭-永興-威興-北靑-西水羅를 잇는 이땅안 최대의 幹線道路의 첫번째 關門이었다. 朝鮮王朝時代 서울에 세워졌던 8개의 大·小門 중에 나머지 7개의 門은 月團(아아취) 천정 즉 다락의 늘바닥에는 모두 龍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東小門만은 鳳凰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그 까닭인즉 이 東小門밖 지금의 城北·三仙·敦岩洞일대에 새가 많이 모여 그 피해가 막심했으므로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새의 王 格인 봉황을 다락에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日帝가 이 땅을 강제 점거한 1906년 이후 이 땅 안 각 고을의 邑城들은 하나씩 둘씩 헐려나갔다. 우선 1907년에 南大門의 左右城樓이 헐렸고 1914년에는 西小門(昭德門)이 헐렸고 다음 해인 1915년에 西大門(敦義門)이 헐렸다. 光化門이 헐린 것은 1926년이었다. 電車를 놓는다고 헐고 도로를 확장한다고 헐었으며 건물과 石壁이 퇴락하여 미관이 좋지 않다고 헐었다. 남기려는 힘은 약하고 헐려는 힘은 강했으니 버티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東小門은 꽤 오래 버틸 수 있어 1928년에 헐렸다. 헐리기 전까지 전혀 수리도 않고 버려져 두었으니 그 퇴락의 정도가 말이 아니었다. 이 문의 門樓가 헐리기 직전인 1928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2변에는 퇴락한 이 門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이 이 門을 소개한 글이 실려있는데 그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東小門 : 破落한 今日殘骸 三仙坪鼓聲도 幻滅 영문장졸의 추격하던 곳도 온데간데 물터로 모여가는 부녀만 오락가락 해 어린애들 수수께끼에 탈 달린 문이 어느 문이냐 하는 문이 즉 바로 나입니다.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나 官名은 惠化門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 世上에 나오던 李太祖 5년 內子에는 弘化門으로 門籍에 등록되었습니다. 燕山君 10년에 原門을 폐쇄되어 버리고 원문에서 조금 右便으로 자리를 정해 옮아 앉고 中宗 6년 昌慶宮의 重修가 落成되자 내 본 이름이 그렇게 좋았던지 그리로 떼어다가 弘化門이라고 이름해버렸으므로 나는 세력에 밀려 惠化門이라고 改名을 하게 되었지요. 英祖 20년 8월에 門上醒樓를 新建 그러나 그때까지도 冠 아니쓴 사람같이 醮樓는 없이 내려오다가 훨씬 세월이 흘러버린 英祖 20년 8월에 御營廳에서 초루를 건설하였으니 불과 184년이지요, 180년이 무궁한 세월로 보아서는 짧다고 할 수 있으나 人生의 一生을 50년이라 하면 三代를 살았다고 볼 수있지요. 三代가 어찌 짧다고 하오리까 내 머리를 좀 보시오. 성한 기왓장은 하나도 없을만치 傷하지 않았습니까. 門規徵收의 始初 北道貨物 總集合 내야 8大門중의 한 小門으로 태어났으니 東大門 같이 큰 소리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나도 내 자랑이야 남만 못하지 않지요. 지금은 稅關이라는 것이 있어 들어오는 貨物에 대하여 稅金을 징수하지마는 서울에 아직 그런 法이 없었던 옛적 正祖때에 맨 처음으로 北道에서 들어오는 物貨에 대하여 門稅라는 것을 바치게 했지요. 유명한 吉布니 썩어가는 明太니 할 것 없이 咸鏡道 물건은 내 문으로 들어왔음으로 門안에는 굉장이 큰 旅閣까지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高宗甲子에 이르러서야 各門이 일제히 나를 본받아 門稅를 받게 되었지요. 이를테면 門稅의 시초는 나지요. 沙阿坪 大平原에 數千將卒 大追擊 문 밖에는 유명한 三仙坪이 있지 않습니까. 三仙坪이라는 이름은 최근에 된 것이고 옛날에는 沙阿坪이라고 하였지요, 옛날에는 沙阿坪에서 五營將卒이 물결같이 모여나가 요새 말로 하면 陸軍大演習이라고 할까요. 追擊을 하던 곳이요. 최근으로 말하면 癸丑年에 各 營門將卒이 나가셔 추격을 하였는데 상감께서 親閱을 하셨답니다. 그때의 삼엄한 光景을 무어라 形容할 수가 없었지요. 五色의 찬란한 깃발은 바람에 날리고 창검은 日光을 희롱하여 창검 旗熾에 天地가 무색하고 북소리 나팔소리는 땅을 움직이어 그 으리으리한 광경이 참으로 장엄하였습니다. 門外處處 名勝地 花雲裡에 人花發 서울의 景敎가 좋은 곳은 의례히 門밖에 있지만은 東小門밖에는 더욱 좋은 곳이 많답니다. 멀리 牛耳洞에는 지금 한창 벚꽃이 난만하였을 터이요. 城北洞북적골(北楮谷)에는 挑花滿發로 名勝地였습지요. 멀리 華溪寺가 있어 三代더위의 좋은 놀이터임은 長安이 다 아는 바이지만 可히 新興寺는 조선의 大利로 神貞王后의 願寺이며 왕후의 貞陵은 물터로 유명하야 찌는 여름철에는 물맞는 부녀들이 하얗게 모여듭니다. 그뿐 아니라 宮中 나인들의 祭도 많아 여름은 實로 女人國같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봄에는 벚꽃 복숭아꽃, 여름에는 사람꽃, 꽃으로 반년은 보내는데 꽃이 많으니 혜화문터만큼 꽃을 탐하는 峰도 자연히 많아 아늑한 놀이터로 여러가지 폐단이 없지 않는 모양 같습니다. 東小門의 門樓는 1928년의 下半期에 퇴락했다는 이유로 헐려버렸고 月團石門(아아취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1939년에 惠化洞에서 敦岩洞버스종점까지 電車선로를 연장할 때 그 공사를 이유로 이 石門마저 헐려버리고 만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28-131쪽
  • 대경성의 내일 위하여 희생되는 동소문, 간선도로 공사 착수 서울의 8문 중 현재 남어있는 문은 동대문 남대문 창의문 광희문 동소문 다섯문인데 그 중 이번에 동소문이 헐리게 되었다. 춘풍 추우 540개 성상의 기나긴 역사를 가진 동소문은 거처러운 세파에 몰리여 자라나는 대경성의 시가지계획령의 실시와 동시에 드디어 그 쇠잔한 자태는 이 따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신설되는 대경성 간선도로의 하나로서 지난 4월 초하루부터 착공된 이 길은 창경원으로부터 돈암정에 이르기까지 연장 1리 길 폭 25미터의 대도로로서 도중에 있는 동소문은 고적조사회의 승낙을 얻어서 부토목과가 관리하게 되어 간단한 석재로서 적당히 처분하게 되었다. 속칭 동소문의 정말 이름은 혜화문으로 부근에 혜화정 혜화공립심상소학교 등의 ‘혜화’라는 두자는 이 문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이조의 태조시대는 홍화문이라고 하였는데 9대 성종 14년에 창경궁(현재 창경원)의 동문을 홍화문이라고 불르게 된 후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중종 6년에 혜화문이라고 개칭한 것이다. 그후 수회 개축하여 화강암의 아취는 왕년의 훌륭하였던 건축술의 자태를 자랑한다. 아취의 중앙석재에 봉황의 표가 새겨져 있는 것은 동소문 밖 일대의 해충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동소문이 헐리는 동시에 옆에 성벽 일부도 헐리게 되었다. 신간선도로의 명년도 완성에 의하여 동소문 3천평의 열무장 1대에 널려있는 인구 약 10만을 포함하고 있는 일대 주택지는 동소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한층 더 삶의 거리로 번거러워진다. 『매일신보』 1938년 5월 26일 2면 3단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28
    http://lod.nl.go.kr/resource/CNTS-00094896792
  •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쪽 문으로 한말까지 기능하다가 두 번에 걸쳐 파괴당한다. 이에 관한 신문 기사는 참으로 서글프다. 경성 성벽의 문들 중에는 동북간 문인 동소문과 동남간에 있는 부정문이라고 하는 광희문은 낡아 위험하기 짝이 없으며 또한 보관을 소홀히 하여 거지의 숙박처가 되어 위생상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이전부터 돈을 들여 고적보존회의 손으로 수리 보관을 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철거하여 불안이 없어 하자는 두 의견이 있어왔던바 고적보존회로부터 경비가 없어서 두 문을 유지할 수 없으니 철거하여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표시하였으므로 토목부 관유재산계에서는 재목만을 내자동에 사는 진모에게 1200여 원에 팔아버려 철거하게 하는 중인데 동소문은 태조 5년에 창건되어 홍화문이라고 하다가 연산군 10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오. (『동아일보』 1928년 7월 12일) 일제강점기 1928년 혜화문은 보존할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루가 헐리고 말았다. 이어 1939년에는 일제가 전차 선로를 연장하면서 남아있던 홍예마저 헐어버렸고, 이 과정에서 혜화문은 완전히 그 모습을 잃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혜화문은 1994년 원래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복원이라기보다는 모형건축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혜화문 현판의 원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현재 혜화문에 걸려있는 현판은 우리의 수준 낮은 문화재 복원 의식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71-72쪽
  • 그 다음으로 파괴된 것은 혜화문이었다. 1928년 혜화문은 광희문과 함께 수리 유지하는데 있어서 경비가부족하다는 이유로, 문루를 1천2백여원에 팔아버리는 짓을 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38년도에는 대경성 계획에 따른 도시 확장을 핑계로 혜화문의 나머지 부분을 파괴하고 도로를 확장했다. 여기서 혜화문 파괴의 이유는 아이러니하다. 일제는 한양도성의 성문 등을 문화재로 파악하고 고적보존회에 맡겨 보호 유지하도록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곧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든 그것을 부수어 버릴 수 있는 논리를 갖추는 것이었다. 일제는 혜화문과 광희문은 퇴락하여 위험하고, 보호가 소홀해 걸인들의 숙박처가 되어 위생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고적보존회는 보존 경비가 부족하니까 문루를 팔고 성문을 부수어 도로를 확장하자는 게 그들의 논리였던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20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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