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의, 여덟 살
2015.03.15
작품 문학
2015년 3월에 출간된 소설로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마흔 살이 된 저자가 여덟 살의 자신을 회상하며 쓴 자전적 소설이다. 배경은 성북구 길음동과 하월곡동 그리고 강북구 미아동 일대를 포함하는 '미아리'이며, '길중국'이라는 화자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학교, 친구 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화자의 가족은 미아리 안에서 다섯 번의 이사를 하며, 다섯 번의 구멍가게를 운영하였는데, 이를 통해 1980년대 초반 미아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길음동 정릉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박민우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2015.03.15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우리 집은 서울 미아리 안에서 다섯 번을 옮기며 다섯 번의 구멍가게를 했다. 나는 미아리 집창촌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방 한 칸에 가게가 딸린 단독 주택이었다고 한다. 방이 한 칸만 있는 단독 주택이라니…. 할머니는 싸고, 생계도 이을 수 있는 집을 미아리 집창촌에서 찾아내신 것이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86쪽
    화자는 1973년 서울 미아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미아리에 난민정착촌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자연히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집값이 저렴했던 미아리에서 화자의 가족들은 생계를 이어나갔다.
  • 형은 집창촌 아가씨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해가 있는 시간이 무료한 아가씨들에게 형의 재롱은 따뜻한 의미였을 것이다. 형을 자기네 술집으로 데려가 맛있는 걸 사 주고, 화장을 시키고, 주머니엔 현금을 찔러 주었다고 한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90쪽
    화자의 가족은 미아리 집창촌 부근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였는데 당시 집창촌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무료한 낮 시간을 달래려 화자보다 두 살 많은 화자의 형을 데려가 함께 놀았다는 내용이다. 당시 갓난아이였던 화자를 돌보며 가게에서 장사를 해야 했던 화자의 어머니는 아가씨들이 큰아들을 데리고 간 뒤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토요일이면 아버지는 중간 크기의 닭 두 마리를 사 오셨다. 고기였다. 고기는 미아리 아이들에겐 절대적 가치였다. 전기 구이 통닭이나 치킨은 열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먹어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도 없었다. 맛을 상상할 수 없어서였다. 어머니는 고추장을 듬뿍 풀고 닭볶음탕을 하셨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174쪽
    우유 배달 일을 하던 화자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주말이면 닭을 사오셨다. '고기는 미아리 아이들에겐 절대적 가치였다.'라는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화자가 생각하는 1980년대 미아리 주민들의 생활 모습 일부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어머니는 소풍이라고 했다. 김밥을 싸지 않으셨으니 나에겐, 우리에겐 소풍이 아니었다. 밥에다가 콩나물과 무채만 넣은 도시락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가게를 봐 주실 수 있는 일요일이었다. 71년생 큰아들을 둔 어머니 셋은 버스를 타고 정릉으로 향하셨다. 일곱살의 73년생에게 예측되는 건 없었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건 좋았고,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 모르는 것도 좋았다. 버스 종점에서 내렸는데, 산을 타야 했다. 산을 오르는 건 싫었다. 어린 애가 키워 놓은 허벅지 근육이란 게 거의 없어서 견디고 싶지 않은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업어달라고 했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때리셨다. 울었다. 어머니는 더 때리셨다. 나는 기를 쓰고 울었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18-219쪽
    화자는 어머니와 형, 형의 친구들과 그 친구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정릉으로 향했다. 화자의 어머니는 '소풍'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정릉동 종점에 내려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점집에 가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가파른 정릉동 산을 힘겹게 오르던 7살 화자의 심경이 표현되어 있다.
  • "아이고, 이 얼빠진 년들아, 싸게 점 보려고 여기까지 왔냐?" 절대 도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감정이 사라진 완벽한 나무 토막이 되었을 때, 목적지는 정체를 드러냈다. 개울가에 있는 집이었다. 낡은 집이지만 무턱대고 오래된 집은 아니었고, 평상이 있고, 나무가 있고, 부엌과 지하수 펌프가 있는 집이었다. 숭인시장 떡집 할머니를 똑 닮은 할머니가 활짝 웃고 계셨다. (중략) "너 이 녀석, 너 이리로 와 봐라." 할머니는 나를 가리키셨다. 손등을 보는 정릉의 신통한 할머니. 어머니들은 71년생 맏이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 산을 올랐던 것이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20-221쪽
    소풍을 가는 것이라는 말에 어머니를 따라 나선 화자가 도착한 곳은 정릉동 산 속에 위치한 어느 점집이었다. 형과 형의 친구들의 점을 보기 위해 71년생 맏이를 둔 어머니 셋은 점집에 찾아간 것이다. 그곳에는 미아동(미아사거리역 부근)에 위치한 숭인시장의 떡집 주인 할머니를 닮은, 손등을 통해 미래를 보는 할머니가 계셨다.
  • 한참을 내려가야 하고, 내려간다고 해도 어머니들은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지 않으실 것이다. 돈을 써서 마실 걸 산다는 건 미아리 어머니들에겐 용납될 수 없는 사치였다. 물이 필요했다. 아무 집에 들어가 수돗물이라도 한 모금씩 들이켜면 되는데, 민가도 나오지 않았다. 뱀 알이 배꼽을 뚫고 나와도 좋았다. 그냥 눈 앞의 물을 마셔 활활 타오르는 목과 가슴 근처를 축이고 싶었다. 계곡에서 머리를 감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을 보자 잠시 흔들리던 아주머니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콸콸콸 흐르는 게 다 물인데, 그 물을 못 마신다는 사실에 더 목이 말랐다. (중략) 바위는 화강암이었고, 물은 투명했다. 딱 맞아떨어지는 물이었다. 단,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밧줄이 처져 있었다. 손잡이도 되고, 울타리도 되는 밧줄이었다. 밧줄을 넘어야 물에 닿을 수 있었다. (중략) 나는 한 마리 구렁이처럼 미끄러졌고, 벼랑 끝에서 상진이 형 어머니의 순발력으로 대롱거릴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내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작은 기적이었다. 아니, 큰 기적이었다. 상진이 형 어머니도 나만큼 놀랐는지, 꺄아악, 정릉을 뒤덮는 비명을 내지르셨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고, 아주머니는 한 번에 힘 있게 나를 건져 내셨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28-230쪽
    정릉동 점집에서 점을 다 본 후,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다. 목이 말랐던 화자는 깨끗한 계곡물을 찾아 마시고 돌아서려는 순간 낭떠러지로 미끄러지고 만다. 다행히 옆에 있던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장면을 통해 계곡에서 머리를 감고 설거지를 하는 등 당시 정릉동 주민들의 생활상 일부를 엿볼 수 있다.
  • 과자 선반 아래에 누워 있던 스카이씽씽을 꺼냈다. 모처럼 독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스카이콩콩의 뒤를 이어 미아리를 점령한 놀이 기구는 스카이씽씽이었다. 다른 동네는 안 가봤지만,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71년생, 73년생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호피티 위에서 껑충거리고, 쌕쌕과 봉봉 주스의 사은품인 찍찍이로 캐치볼을 하며, 매달 <소년중앙>을 기다렸던 아이들은 전국에 바퀴벌레처럼 우글우글했다. 세 개의 바퀴가 앞뒤로 달려 있는 스카이씽씽은 미아리 아이들의 자가용이었다. 이 작은 스케이트보드 하나면 웬만한 자전거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35-236쪽
    화자의 형이 친구 집에 놀러 가 집을 비운 사이, 혼자 집에 있는 스카이씽씽을 타려는 화자의 모습이다. 이 부분에서는 1980년대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알 수 있다. 스카이씽씽, 호피티(고무 말), 찍찍이 캐치볼과 같은 당시 인기 있던 놀이 기구와 음료, 잡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선생님은 아이들 눈을 감게 하고 부모님의 학력, 직업, 텔레비전의 유무를 물어보셨다. 눈을 감아야 했지만, 몇 번 떴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졸업,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 전세, 텔레비전 있음, 아버지 직업은 상업. 이 정도면 미아리에서 꿇릴 정도는 아니었다. 육성회비를 못 내서 교무실로 불려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기억이 맞다면 육성회비는 매달 640원이었다. 삼양라면 한 봉지가 백 원이었다. 그런데 650원이 없어서 교무실에 불려가 싫은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 열 명은 되었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43-244쪽
    화자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 미아리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국민학교 1학년이 된 화자는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정 형편 조사를 통해 자신과 친구들의 생활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 처음 와 본 집은, 완벽하게 빤해서 좀이 쑤셨다. 백 원짜리 동전이 생길 분위기가 아니었다. 암에 걸린 아주머니라니. 돌아가는 길에 순대를 사 먹자고 졸라도 안 될 것 같았다. 벗겨진 철문, PVC 재질의 푸르둥둥한 지붕을 갖춘 보통의 미아리 집이었다. 옆집과 옆집의 옆집도 모두 같을 것이다. 어머니 친구들은 대부분 전세살이였고, 아주머니도 그랬다. 마당 구석을 차지한 단칸방은 끈적이는 럭키 모노륨 장판이 거뭇거뭇 연탄불에 눌어붙어 시멘트 방바닥을 덮고 있을 테고, 개나리 벽지는 지구표 색연필과 왕자파스 낙서로 지저분할 것이다. (중략) 미아리에서 부업을 하지 않는 집은 없었다. 마늘을 까서 삼양라면 공장에 납품하거나, 이불 껍데기에 반짝이를 붙이거나, 인형 눈알을 붙이거나, 나무젓가락에 비닐을 씌우거나 뭐든지 하나씩은 했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57-259쪽
    화자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 미아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화자가 본 당시의 '보통의 미아리 집'이 묘사되어 있으며, 미아리 주민들이 부업으로 삼았던 일들을 나열하고 있다. 본문에 언급된 삼양라면 공장은 당시 도봉구 창동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월곡동에 본사가 있다.
  • 눈싸움과 눈사람으로 설레야 할 나이에 눈의 저주가 뽀득뽀득 꼬집고 할퀴었다. 겨울이 싫은 건 전적으로 우유 배달 때문이었다. 배달 심부름도 끔찍했다. 업소 중 한낮에 문을 여는 곳은 가끔 형이나 내가 가야 했다. 미아리에서 제일 큰 롤러스케이트장도 주요 거래처 중 하나였다. 유명한 아역 탤런트 아버지가 한다는 롤러스케이트장이었다. 미아리 73년생이라면 누구라도 가고 싶어 했지만, 우린 너무 어렸고 돈도 없었다. 음악 소리와 삐딱하고 경솔한 조명이 한창인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들어섰을 때, 난 갈 길을 잃은 문어처럼 있지도 않은 빨판만 꼼지락거렸다. 그 폭력적인 화려함에 기가 죽어서, 입을 벌리고 멍청해져야 했다. 반듯한 바닥을 바퀴달린 신발로 백조처럼, 연꽃처럼 떠다니는 저 아이들은 김민재 아동복에, 매일 도미표 소시지를 먹는 아이들일 것이다. 영훈 국민학교를 다니고, 소머리표 마가린이 아닌 슬라이스 치즈에 밥을 비벼 먹는 아이들일 것이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68-269쪽
    화자의 아버지가 우유 배달 일을 했던 시절, 화자도 아버지의 일을 도와 배달 심부름을 다녔다. 이 장면에서는 미아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우유 배달 심부름을 간 화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1985년 지금의 이마트 미아점(길음동 위치) 자리에 들어섰던 파레스 백화점 내 롤러스케이트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파레스 백화점은 1985년 말에 개점하여 운영되다가 1987년 부도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88년에는 신세계백화점 미아리점이 들어섰으며 현재는 대형 마트인 이마트가 영업 중이다.
  • 선생님과의 인연은 사실 대단한 게 아니었다. 미아리 집창촌에서 구멍가게를 할 때, 선생님은 건너편 불고기 집 이 층에서 하숙을 하셨다고 한다. 우리 가게를 이용하던 손님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웃에 선생님이 산다는 사실에 콩나물이며 두부, 사과며, 귤이며 인심 좋게 퍼 주셨다. 내가 태어나자 작명을 부탁했고, 중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둘째라서 가운데 중(中)자가 아니라 무거울 중(重)자를 쓴 거라고 했다. 놀림감이 되던 내 이름이 신중하고, 점잖은 어른이 되라는 의미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294-295쪽
    국민학교 2학년이 된 화자의 새로운 담임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2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은 화자의 가족이 미아리 집창촌에서 가게를 운영할 당시 근처에 거주하며 자주 오던 손님이었다. 어머니는 선생님을 살갑게 대했으며 선생님은 화자가 태어나자 '길중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할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선생님은 2학년이 된 화자를 보자, '길중국! 나 모르겠어? 삼촌이잖아, 삼촌.'이라고 이야기하며 친밀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 어머니는 자주 나처럼 떠다녔던 것 같다. 초롱이를 찾아 나는 열심히 날아다녔다. 앞산과 빡빡산, 명약국 사거리와 숭인시장, 대지극장과 미아리 고개까지 헤매고 다녔다. 날아다니는 건 꿈이나 비슷했다. 수 많은 것들을 지나치지만, 분명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를 자주 보긴 했지만, 사무적으로 지나치기만 했다. 어머니인지 어머니 같은 사람인지도 불분명했다. 날아다니는 모든 것들은 다 그렇게 불분명했고, 부질없었다. 숨을 곳도 없는 사람들, 몸 안에 있는 게 끔찍한 이들은 그렇게 날았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도, 날기로 한 이상, 끔찍이 반가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었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337쪽
    화자의 아버지는 우유 배달을 그만두고, 신도림동에 자동차 부품 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사고로 손가락을 잃게 되고 다시 우유 배달을 시작하지만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미아리에서 운영하던 가게마저 팔게 된다. 가게를 정리한 후 화자의 어머니는 집 밖을 자주 배회하였고, 같은 시기 집에서 키우던 반려견인 '초롱이'의 죽음으로 슬픔을 겪던 화자 또한 성북구 일대를 배회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그러한 화자와 화자의 어머니의 모습이 묘사되었는데, 미아리고개, 숭인시장, 대지극장(현 CGV 미아점) 등 성북구 및 성북구 인근에 위치한 구체적인 장소가 언급되고 있다.
  • 우리 앞을 오르막이 산처럼 가로막았다. 미아리를 통틀어 가장 비정한 오르막이었다. 빙판이 되면 그 어떤 차도 오를 수 없는, 미아리의 히말라야를 올라야 했다. 오르막을 넘어 평지가 나오면, 우리의 차고 방이 곧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아버지의 발뒤꿈치가 자꾸만 신발에서 빠져나왔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아버지의 발뒤꿈치는 벼랑처럼 깊었다. 멍청한 벌레라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미로가 그곳에 있었다.
    박민우, 2015, 마흔 살의, 여덟 살, 341쪽
    빚 때문에 가게를 팔고 큰집의 차고로 이사를 하기 위해 짐을 옮기는 화자와 가족들의 모습이다. 산동네인 미아리의 지형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장지희
  • 작성일: 202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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