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
1920.04.13 - 1976.01.02
인물 개인 화가
동양화가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년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운보 김기창과 결혼한 후 1954년 성북동 55-1번지(현 운우미술관)에 집을 마련하였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인 화실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10여 차례의 부부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1966~1967년 성신여자사범대학(현 성신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판화 수업 등으로 뉴욕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76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 「부엉이」(1953), 「노점」(1956), 「작품 19」(1965) 등이 있다.
성북동 돈암동
  • 같은 길을 가는 부부(夫婦) ; 화가(畫家) 김기창(金基昶) 박래현(朴崍賢) 부부(夫婦) 두 분이 특선(特選)에 누차당선(累次當選) 부처전람회(夫妻展覽會)만도 다섯 번 청각(聽覺) 잃은 부군(夫君)과의 고락(苦樂) 10년(年) [사(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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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창·박래현 집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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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길을 가는 부부(夫婦) ; 화가(畫家) 김기창(金基昶) 박래현(朴崍賢) 부부(夫婦) 두 분이 특선(特選)에 누차당선(累次當選) 부처전람회(夫妻展覽會)만도 다섯 번 청각(聽覺) 잃은 부군(夫君)과의 고락(苦樂) 10년(年) [사(寫)]
  • 김기창·박래현 집터 표지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朴崍賢
  • 이명칭: 우향(雨鄕), 박내현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55-1 (선잠로 12-11 )
  • 비고: 운우미술관

근거자료 원문

  • 흥이 많았던 예술가들은 이 시절을 그래도 아늑하게 기억했다.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는 외진 곳이라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도 행복한 삶을 꾸렸다. 부인도 천생연분, 자연도 천생연분이라고 기록으로 남긴 그의 글에 사랑이 담뿍 배어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0쪽
  • 같은 길을 가는 夫婦(부부) (3) 畵家(화가) 金基昶(김기창)(44) 朴崍賢(박내현)(38) 夫婦(부부) 두분이 特選(특선)에 累次當選(누차당선) 夫妻展覽會(부처전람회)만도 다섯 번 聽覺(청각)잃은 夫君(부군)과의 苦樂(고락) 10年(년) (상략) ○…부인 박래현(朴崍賢)씨 역시 오늘날의 한국화단의 중견적 존재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작년 「대한미협전」과 「제5회국전」의 양대미술전람회에서 당당 대통령상을 받은 정예화가이다. ○…일찌기 「경성여자사범」을 졸업하고 동경(東京)의 「여자미술전문」에서 학업을 마친 당시로 말하면 여자로서는 「최고교양인」이 어떻게 돼서 청각의 자유를 잃은 그러기 때문에 제대로의 학교교육도 받지 못한 현부군인 김씨하고 결혼을 하게 됐는가? 여기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에피소-트」와 「로맨스」가 숨어있는 듯하였다. ○…5년 동안을 두고 연애가 계속되면서도 맺아질 수 없는 듯이 보이던 서로의 사랑에 젊은 두 남녀의 가슴은 몇 번이고 찢어질 듯 메어질 듯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꾸준한 그들의 사랑은 부인의 양친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드디어 화촉을 밝혔으니 금년으로 꼭 10년- 오늘에는 1남 3녀를 거느린 어버이가 되어 행복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고향이 평남인 탓이려니- 성격이 아주 활발한 부인은 남편의 농(聾)이 화가로서 성공을 하는데 도리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전화위복」적인 결과에 만족한 듯하였다. 부인의 남편에 대한 사랑은 지극한 듯- 서로가 화가인 인연으로 알게 된 그들은 처음에는 상호간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불편도 느꼈는데 지금은 둘 사이의 통화는 충분하고 부인의 덕으로 10년 전의 김씨와는 딴판으로 말도 제법 배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기자와의 대담에서도 간단한 말은 충분히 통할 수 있었다. (하략) 『동아일보』 1957. 4. 4.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2
  • 평북 평양 출생. 원시성과 추상성을 작품에 담은 화가이다.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고, 1956년 대한미협전에서 <이른아침>, 국전에서 <노점>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순수 추상 작업을 시작하고, 판화 등 새로운 매체를 시도한다. 운보 김기창과 혼인 한 후 1954년 성북동 55-1번지에 집을 마련하였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인 화실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 1967년 미국 뉴욕에서 남편 김기창과 부부전을 개최한 뒤 7년 동안 뉴욕에서 판화연구에 몰두하였다. 새, 닭, 물고기 문양 등을 주요 소재로 동판화를 만든다. 1974년에는 귀국전을 개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암으로 2년간 투병 끝에 1976년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61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1957년 4월 4일 『동아일보』기사에도 고향이 평남이라고 서술되어 있어 원문에 평북 평양 출생이라는 정보는 오기로 파악된다.
  • ·화가 박래현 별세 동양화가 우향 박래현 여사가 2일 상오 11시 서울 성북동 55의1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55세. 경성여자사범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나온 박 여사는 56년에 국전 대통령상, 74년에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그는 64년 이래 3차례에 걸쳐 해외에 체류했는데 지난 5년 동안 「뉴요크」에서 그림 제작 중 건강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 유족은 부군 김기창 씨와 1남3녀. 영결식은 6일 상오 11시 자택, 장지 파주군 금촌읍 낙원공원 묘원. 『중앙일보』 1976. 1. 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6쪽
  • 운보의 아내로 알려진 우향 박래현은 1944년 동경여자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수상하고 1956년 국전에서는 <노점>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는 등 운보만큼이나 훌륭한 화가다. 일본으로 그림유학까지 떠날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우향은 친정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6년 운보와 결혼해 내조하면서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다. 청력을 상실한 탓에 말을 하지 못했던 남편에게 구화법을 끈질기게 가르쳐서 어눌하게나마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도 우향의 눈물 어린 내조 덕분이었다. 서로의 예술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히 존중하면서 각자의 독창적 작품활동을 해나갔다. 해방 이후 전통 동양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추상적 모색을 하는 등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으로 판화공부를 위해 떠나 7년여간 머무르면서 판화의 새로운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성신여대 교수를 역임하고 국전심사위원을 거쳤으며(1961-1963)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1974). 운보는 <등나무 그늘진 곳에>라는 글에서 성북동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면서 애정을 표했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친구마다 정원이 좋다 한다....크고 작은 종류의 나무들의 좁은 마당에 가득이 들어차있어 여름이 되면 푸른 향기가 시원한 촉감과 아울러 코 속에 스며드는 곳이기도 하다. 성북동 꼭대기라 교통이 불편하지만 오륙년 지내오면서도 궁둥이를 툭툭 털고 좀 드나들기 수월한 곳으로 떠나가지 못하는 것도 상록수 우거진 우리 집 정원의 탓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함께 머물렀던 성북동 집은 운보가 1984년 충북 청원으로 떠나고 난 이후에 두 사람의 예술혼을 기리는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9-200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박래현 주소(현재): 성북동 55-1 분야: 미술(동양화) 비고: 김기창의 아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정의 해방 이후 「부엉이」·「노점」·「작품 19」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개설 호는 우향(雨鄕).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 군산으로 이주하여 일본인 미술교사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937년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9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女子美術專門學校) 사범과 일본화부를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 순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2년만에 사임하고 일본에 건너가 1940년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중이던 1941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고, 1943년에는 특선에, 총독상을 수상하였다.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이후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와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창립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Sao Paulo Biennale)의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출국하여 남미(南美) 각국과 멕시코 등지를 시찰하였고, 이러한 여행을 계기로 서구 미술의 방법론과 판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뉴욕의 밥 블랙번(Bob Blackbunn) 연구소와 프렛(Pratt) 그래픽 센터에서 판화와 타피스트리(tapestry)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최한 귀국 판화전은 우리나라 화단과 판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5년 다시 판화 수업을 하기 위하여 미국에 갔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회복하지 못하고, 1976년 1월 2일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1946년 김기창(金基昶)과 혼인한 이후 그와 더불어 국내외에서 1947년 이래로 모두 10여 차례의 부부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구사하면서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화면 속에 끌어들여, 감각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강렬한 화풍을 이룩하는 등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이러한 회화 세계는 대체로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1940년대)는 일본 화법에 근거를 둔 인물화 작품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이다. 제2기(1950년대)는 김기창과 더불어 동양화의 재료를 가지고 서양 현대 조형이 쌓아 올린 분석적인 방법을 원용하여 대상에 대한 입체적인 형태 해석과 면 분할이라는 반추상적(半抽象的)인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제3기(19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상성이 강한 화풍을 이루었다. 제4기(1970년대)는 판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하여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보여 주었다. 대표작으로 「단장」(1943)· 「노점(露店)」(1956)·「이른아침」(1956)·「작품 19」(1965년)·「작품 F」(1973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40년 선전 최고상(창덕궁상),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56년 제5회 국전 대통령상, 1972년 문화공로상, 1974년 제6회 신사임당상 등을 수상하였다. 1978년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2020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10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 박내현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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