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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문화재 수장가 수정 박병래
1. 수정 박병래(1903~1974)
○ 1903년 논산 출생, 의사이자 수장가 “조선 사람이 조선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느냐?”는 일본교수의 말에 자극 1929년부터 수집, 1974년 362점의 조선자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 돈암동 산 40번지 거주
○ 성모병원 초대 병원장, 성루가병원 설립 (폐결핵 전문병원)
○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일할 때 도자기에 관심 → 위창 오세창, 간송 전형필, 도상봉 등과 교류하며 안목을 키우고 백자를 수집
○ 일제강점기부터 해방후 시기의 골동상과 수집가들 사이에 벌어진 일화를 모은 수필집 『도자여적』과 자서전 『백자에의 향수』를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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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수집가이자 성모병원 초대 병원장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성모병원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폐결핵 전문병원 성루가병원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병원에서 일할 때 도자기에 관심을 가진 이후 위창 오세창, 간송 전형필, 도상봉 등과 교류하며 안목을 키우고 백자를 수집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시기의 골동상과 수집가들 사이에 벌어진 일화를 모은 수필집 『도자여적』을 남겼다. 40년 동안 모은 소장품 360여 점을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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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朴秉來) 1903-1974 수정(水晶)
의사. 충남 논산 출생.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내과를 전공하였으며, 1935년 성모병원(현 가톨릭대학 의학부속병원)을 세워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결핵협회장·대한내과학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보건후생분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말년에는 1929년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조선백자를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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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모은 조선시대 도자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우리 문화를 지킨 수집가로, 평생 의술醫術을 펼친 의사로 나눔을 실천한 수정 박병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1936년 성모병원이 개원하며 초대 병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은 한국가톨릭교회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신도들의 기금을 모아 일본인이 경영하던 무라카미병원을 매입하였고, 박병래의 의견에 따라‘성모병원’이라 이름 지었다.
박병래는 평생 신앙을 통한 봉사, 나눔을 실천하며 살았다. 사회봉사를 근본정신으로 한 성모병원뿐만 아니라 1957년에는 서울 관철동에 자신의 세례명을 딴 성루가병원을 세워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성루가병원은 폐결핵 전문병원으로 개원 당시 종합내과전문병원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경성대학부속병원의 전신인 조선총독부병원에서 일할 때 사기그릇에 감탄하는 일본인 교수를 보고 도자기에 관심을 가진 이후 위창 오세창, 간송 전형필, 도상봉 등과 교류하며 안목을 키우고 백자를 수집하였다. 공군의무감醫務監으로 지방에 있을 때도 틈틈이 골동품 가게를 다니며 백자를 모았다. 수집에 취미를 붙인 1930년대에는 병원 일을 보는 한편, 오후가 되면 서울시내에 있던 골동상 열두 곳을 날마다 돌아보는 것이 일과였다.
돈암동 자택(4가 87)은 목가구와 수집한 백자, 수석이 알맞은 자리에 놓인 한옥이었다. 아내인 최구 여사가 키우는 한란, 세심란 같은 여러종류의 난초가 어울려 운치를 자아냈다.
한옥 기와집 고가인 우리집은 신식집처럼 방이 넓지 못하나 안정된 고전미는 있다. 내게는 서재도 되고 많잖은 부인네 손님에게 방석을 권하며 앉히게 되는 이 건넌방은 별로 꾸민 것이라곤 없지만 몇가지 가구의 배치로 조용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책을 얹어두는 사방탁자, 그 옆에 조선시대의 책상을 배치하여 그대로 책상으로 쓴다. 묵은상에 수집한 돌이나 조그마한 화분을 바꾸어 가며 얹어두면 영창의 창살과 어울려 마음에 드는 방이 된다.
최구, <겨울철 장식> 동아일보, 1969.01.23
“내 나이 지금 70밖에 안되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와서 90년 살고 갑니다. 의사로서 50년 봉사하고 이조자기를 아끼는데 40년이 걸렸어요.”
40년 동안 아끼며 보전한 소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 전 도록을 발간하고, 자신의 수집 인생을 회고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74년 3월 발간된 『도자단상陶瓷短想』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시기의 골동상과 수집가들 사이에 벌어진 흥미로운 일화들을 통해 문화재 수집을 향한 각별한 마음과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수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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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는 수십 년 간 쌓은 안목으로 백자와 청화백자로 된 문방용구나 소품 중 뛰어난 작품을 선별하고, 체계를 갖추어 수집하였다. 도자기를 수집하며 시대 배경과 양식, 기술, 재료까지 세심히 살피고 공부하였다. 고려청자에 비해 조선시대 백자에 관심이 많지 않을 때부터 백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꾸준히 모은 그의 소장품은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관점이 분명히 잡혀 있다’는 평을 받는 정품精品이었다.
의술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종교의 뜻에 따라 베풀고, 문화재를 수집하는 즐거움으로 살았다고 회고하듯이 호사가의 취미가 아닌 수집가로서 삶을 산 박병래는 1974년 삼백 육십 점이 넘는 소장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박병래 기증 기념 특별전시를 준비하며 집으로 찾아온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학예실장에게 “골동에서 얻는 것이있다면 우리 것을 알게 된 것”이라며 진심으로 문화를 아낀 마음을 내보였다. 세상을 뜨기 전 ‘문화재는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1974년 72세 생일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조자기특별전’을 열어 투각운룡문연적, 매죽문필통, 청화백자구형연적, 청화백자추초문팔각병 등 기증품 중 242점을 선보였다. 안타깝게도 전시 개막을 열흘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아름다운 마음과 뜻깊은 실천은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또 다른 유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