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2014.01.31
작품 문학
2014년 1월에 발간된 단편소설이다. 1963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자가 돈암동 산동네에서 보고 겪은 기억들을 허구적 요소와 결합하여 회고의 방식으로 엮어낸 소설이다.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에서 저자는 직접 화자가 되어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서술하고 있는데, 준호형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1960년대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또한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은 돈암동 전차종점, 고명상업학교, 미아리 고개 등 구체적인 지명을 통해 작품의 배경이 표현되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성북구의 모습과 분위기 등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돈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조해경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2014.01.31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준호 형과 이야기를 하던 곳은 항상 같이 다니던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바라보이는 돈암동 산동네. 그 산동네 길을 50년이 지난 지금도 꿈속에서 자주 오르내리면서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리곤 한다. 지금도 가끔 무의식적으로 그 산동네가 문득문득 낯선 거리의 지도를 바라볼 때처럼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12쪽
    화자는 50년 전 중학생 시절 돈암동 산동네에서 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화자는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혜화동에 위치한 동성중학교로 통학하였는데, 성북구 지역의 전차는 서울 도심의 확장에 따라 돈암동 지역의 시가지 개발이 이루어지던 1941년에 개통되었다. 돈암동 노선은 을지로 4가에서 시작하여 돈암동을 종점으로 운영되었다.
  • 그 동네를 떠올릴 때면 내 머리 속은 비어있는 캔버스에 붓으로 그림을 채워가듯 하나씩 하나씩 채워지게 된다. 고명상업학교와 성신여대 뒤편에 있는 산동네. (···) 산동네 사람들의 하루일과는 공동수도에서 시작된다. 아침밥과 하루 쓸 물을 받기 위해 어깨에 빈 물 초롱 두 개를 지고 공동수도가로 내려와 물 초롱 들이 아래 마을까지 줄이어져 놓여 있었으며 물 초롱 옆에는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물지게를 지고서 차례를 기다린다. 더러는 사람들끼리 먼저 물을 받으려고 어깨싸움을 하기도 했고, 물 초롱을 꽉 채우려고 하다가 초롱 밖으로 물이 넘쳐나 기다리던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수도 주변에는 사람들이 물을 받다 흘린 물로 길바닥은 항상 철벅 거렸다. 집들은 길옆으로 허름한 축대 위에 어설프게 지어져서 담벼락도 벽돌로 제멋대로 짜 맞추어서 지어진 집들이다. 대문도 짝이 맞지 않는 문짝들을 가져다가 달아 놓았기 때문에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산을 끼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옆으로는 고명상업학교의 담 자락이 보이면서 훤하게 삼양동과 미아리 고개의 건너편 동네가 보이고 멀리는 북한산과 상계동의 수락산이 까맣게 보였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12-13쪽
    1960년대 돈암동의 풍경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60년대 서울은 급격한 인구 증가 현상을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도시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급히 지은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들이 돈암동에도 생겨났다. 또한 고명상업학교, 성신여대, 삼양동, 미아리 고개, 북한산 등의 지명을 통해 소설의 배경이 설명되고 있어 이를 통해 구체적인 위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명상업학교는 현재 고명외식고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어 운영되고 있다.
  • 1963년 봄, 서울의 하늘은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혜화문 문밖의 삼선교와 돈암동과 미아리 쪽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동대문 밖의 왕십리쪽은 아침부터 근대화계발의 신호를 알리는 공장들이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16쪽
    금형제조업 공장지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60년대 왕십리 뉴타운 지역에 대한 서술이다. 화자가 살았던 돈암동 산동네 주변은 왕십리와 같은 타 지역에 비해 산업 지구가 상대적으로 덜 형성되었음을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다.
  • 1963년 산동네에서는 함씨가 이상사의 청와대 힘을 이용하여 이상사와 함께 돈암동 산동네를 새로운 동네로 만드는 재개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재개발 사업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동네의 무허가 판자 집들을 새집으로 만드는 것과 불이나면 소방차들이 진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소방도로를 만들어서 소방차들이 원활히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일은 집도, 소방도로도 아닌 공동수도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 위로 길어올리는게 산동네 사람들에겐 가장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도공사 계획은 고명학교 산꼭대기에 큰 물탱크를 설치하고 그 물을 각 가정에 공급하도록 수도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23-24쪽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다량의 인구가 서울로 유입되어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도시 빈민촌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었던 1960년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허가 판잣집들은 상하수도 문제, 화재의 위험 등 다양한 문제를 품고 있었지만 돈암동 산동네 주민들에게 가장 심각한 이슈는 수돗물 공급이었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고지대에 위치한 각자의 집까지 운반해야 하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제 돈암동 산동네도 발전의 희망의 싹을 틔우는 듯 했다. 서울시에서는 돈암동 산동네 주민들에게 수돗물 공급을 위해서 예산을 책정해서 수도사업소를 통해서 추진위원장에게 예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 추진사업의 예산이 빨리 책정 된 것은 추진위원장인 이 상사의 브로커 기질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상사는 청와대 경호실 말단 직원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힘을 잘 이용하였다. 별 일 아니더라도 ‘내가 청와대에 있는데 우리 일 좀 빨리 처리해 주시오. 부탁합니다.’라고 하면 담당 직원은 그 사람이 어떤 기관에 있는지, 직급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빨리 일을 처리 해 주었다. ‘청와대’라는 고속버스 티켓이었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39-40쪽
    이 대목에서는 공권력이 소수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양상에 대한 묘사가 서술되어 있다. 작중 이 상사는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돈암동 산동네 수도사업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도록 한다. 1963년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가 수립되기 전 3년간 이어져 온 군사 정권의 막바지에 있었다.
  • 산동네 수도사업추진위원회는 성북구 수도사업소장에게 산동네 주민들에게 돈을 걷는 문제에 대해서 상의를 하자 수도사업소장은 서울시 예산에서 부족한 부분은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에게 일괄적으로 위임을 한다고 하였다. 단, 돈을 거두는 영수증은 성북구 수도사업소장의 직인을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영수증은 사업소장이 발급해 주겠다고 하였다. 성북구 수도사업소장은 사업추진위원장인 이 상사에게 서울시의 직인이 찍히고 일련번호가 매겨진 영수증을 몇 뭉치를 직원을 통해서 전달했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49쪽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성북구 수도사업소는 1961년에 신설된 종로구와 성북구를 관할하는 북부수도사업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1년 서울시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에 따른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물 사용량이 증가하자 수도 행정체제를 대폭 강화하여 다양한 수도 사업을 진행하였다.
  • 현장에서의 공사는 관리부서의 분열과는 관계없이 순차적으로 잘 수행되어져 나가고 있었다. 경찰에 고발하려다 하지 않은 것을 알았는지 이상사와 함총무도 행동거지를 조심하였고 준호형도 감사역할을 무난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북서 형사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준호 형을 비롯한 추진위원들을 경찰서의 지프차에 태워서 서의 조서실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83쪽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성북서는 1945년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운영되어 온 경기도 경찰부 산하 10개 경찰서 중 하나인 성북경찰서에 해당한다. 준호형과 양의원, 장교수는 이 상사 일당의 꾐에 넘어가 성북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
  • 결국 파면의 극단적인 조치가 내려졌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권력을 쥔 고급공무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돈암동 산동네에서는 형이 기획원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에 모두가 다 빽줄을 잃어버렸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준호형이 기획원에서 일하는 동안 산동네에서 추진하는 수도공사는 예정대로 잘 되어서 이제 산동네 사람들은 산 아래에 있는 공동수도에 가지 않아도 자신의 집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공사가 끝나면서 수도사업 추진위원회도 해산했다. 지방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구청 단속반의 철저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돈암동 산에 비어있던 공터에 무허가 집들로 꽉차버렸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132쪽
    정부는 1954년부터 도시 안에 판잣집의 신축을 금지하고 1950년대 후반부터 강제 철거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주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행해진 강제 철거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판자촌 주민들은 철거 지역에 다시 무허가 주택을 짓기도 하였고, 더불어 196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난 이농현상으로 판자촌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지방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구청 단속반의 철저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돈암동 산에 비어있던 공터에 무허가 집을 지었다는 대목에서 1960년대 당시 무허가 판자촌을 둘러싼 갈등을 엿볼 수 있다.
  • 술은 육체적인 건강만을 뺏어가지 않았다. 그의 영혼도 함께 가져갔다. 준호형은 술 없이 생활할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 대신 옆에 있는 술병을 병째 들이켰다. 알콜 중독 때문에 실어증과 정신장애도 찾아왔다. 급하게 술을 마신 탓이었다. 그의 눈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총기는 사라지고 초점없는 광기의 눈만 남았다. 가족들은 형의 고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삼선교 근처의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세가 호전되자 그를 퇴원시켰다.
    조해경, 2020, 돈암동 전차종점 사람들, 141쪽
    절망과 좌절감으로 인해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는 준호형에 대한 묘사를 담은 대목이다. 준호형은 결국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이 대목을 통해 1960년대 삼선교 근처에 정신과 병원이 운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박이선
  • 작성일: 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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