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도
1946
인물 개인 마을주민
정릉동 교수단지에 대를 이어 거주하는 마을 토박이이다. 그의 선친이 평안남도 지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의 집을 ‘지사댁’라고도 부른다. 당시에는 땅을 불하받은 서울대 교직원 중 실제 교수단지에 입주한 경우는 많지 않았으며, 그의 선친 역시 친척의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선친이 처음 건축허가를 받아 집을 지은 곳이 아니라, 집이 좁아서 맞은편 땅이 매물로 나오자 대지를 사서 집을 다시 지은 곳이라고 한다. 현재 마을의 산증인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정릉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99, 18통~20통 (아리랑로19다길)
  • 비고: 교수단지

근거자료 원문

  • 2. ‘지사댁 아들’ 선친의 대를 이어 교수단지에 터를 잡다 박성도(남, 69세) 교수단지가 조성된 이후 줄곧 마을을 떠나지 않은, 교수단지 내의 토박이 박성도 씨. 그는 선친이 교수단지에 터를 잡은 후 지금까지 교수단지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선친이 교수단지에 건축허가를 받은 것은 1976년으로 친척 할아버지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일 때의 일이다. 친척 할아버지의 추천으로 그의 아들과, 선친이 두 필지를 불하받게 되었다. 당시 땅을 불하받은 서울대 교직원 중 실제 교수단지에 입주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건축허가가 나기 전 땅을 매도하고 나가거나 집을 지어도 실소유주가 거주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분양 당시 분양받은 사람들에게 의무 거주기간을 두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매매가 가능했다. 당시 교수뿐만 아니라 교직원도 분양이 가능했으며, 분양 후에는 서울대 교직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매매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네사람들은 박성도 씨의 집을 ‘지사댁’이라고 부르곤 했다. 선친이 17년간 평안남도 지사를 지내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박성도 씨의 선친 박재창(1914-2010)은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 광복 후 고당 조만식 선생이 북한에서 창당한 조선민주당에서 활동했다. 월남 후에는 17년간 평안남도 지사(1962-1979)를 지내면서 월남한 도민들의 화합에 기여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위원장도 맡아 고당기념관, 고당 동상 건립 등 고당 선생을 선양하는 사업을 펼쳐 왔으며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를 지냈다. 생전에 황조근정훈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박성도 씨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선친이 처음 건축허가를 받아 집을 지었던 곳은 아니다. 처음 분양받은 터에 집을 지어 생활했으나, 집이 좁아서 맞은편 땅이 매물로 나오자 대지를 사서 집을 다시 지었다. 선친 때부터 교수단지에 살기 시작한 박성도 씨는 어느덧 마을 건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는 마을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박성도 씨 구술 여기가 인제 저쪽 위로 불리는데, 교수단지라고 이제 간판도 붙어있고 그런데요. 어떻게 교수단지가 만들어졌는고 하니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그때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변변하게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지시를 했어요. 교수들이 조금 안정된 생활을 해야지 “한국에 인재를 기르는데 도움이 될 거다” 해가지고 그 당시에 지금은 문화재청이지만은 문화재관리국 그게 서울대에 땅을 좀 불하를 해가지고 집을 지은 게 아니고 집을 지을 수 있는 터를 조성을 했다구요. 그래서 자세히 보게 되면 교수단지 쪽으로는 도로도 환상으로 돌아가는 도로로 되어있고 나름대로 신경을 썼어요.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토목 설계도 직접 하고, 그리고 지금 박여병 선생이라고 계신데 그분이 그 당시에 서울대학교에 교무과에 근무를 하셨다고요. 그래서 그 내용은 그 분이 잘 아시지만, 하여튼 우리 돌아가신 친척 할아버지가 계신데 그 분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하셨어요. 그분이 추천을 해서 그 분 자제분하고 우리집하고 두 필지를 해 가지고, 그래서 건축이 박여병 씨하고 처음에 건축이 시작된 거예요. 그러면서 그때만 해도 이 밑으로는 집들이 거의 없었다고요 거기 건축이 시작되니까 요 밑에 어떤 사람이 문화재청에 불하를 받아가지고 필지를 만들어서 쓰고 그러면서 이 밑에 마을이 아마 조성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게 햇수로 따지면 40년 전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들은 필지만 불하 받아가지고 매도한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거기 집 짓고 들어와서 산 사람들이 전부 다 교수는 아니에요. 중간에 나대지(裸垈地)로 매매한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로 했기 때문에 그 동네 이름이 교수단지다 그렇게 붙여진 거예요. 지금 김영갑씨 사는 집이 내 아저씨, 박수창씨라고 그 양반이 연세가 좀 됐지만 삼선교에서 피부과 지금 개업하고 있어요. 그 양반이 거기 집을 짓고 살고 우리가 처음 지은 집이 박종례 사장 사는 집. 그 집을 우리가 손수 지었다구. 우리가 그 집에서 살다가 집이 좁아가지고 그 앞에 집 있는데 거기가 좀 넓어요. 그게 땅이 매물로 나와 가지고 대지를 사서 그 집도 우리가 지은 집이야. 그때는 서울대 교수한테 분양을 해가지고 분양받은 사람들이 몇 년 의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으니까 …… 그냥 형편에 따라 매매가 되고 이랬으니까 실제로 들어와서 산 사람들은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많이 저기 하니깐. 꼭 교수단지라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직원이더라도 교수가 아니더라도 분양을 받을 수가 있었고. 그래 처음에는 그렇게 되는 거고. 고거 하고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만 저기 508단지 들어가 있는 동네가 옛날에는 508 중앙정보부단지라고 했어요. 그것도 교수단지나 같은 맥락으로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위해서, 거기 땅을 불하를 해가지고 집을 지었다고. 옛날에는 중정단지라고 해서 택시 타고 “중정단지 갑시다” 하면은 택시기사들이 무서워하고 그랬다고. 그때 와서 근데 스카이웨이가 뚫린 게 군사 목적으로 뚫린 게 되어가지고 아주 그때는 차도 고급차들이 없을 때에요. 그 지프 있잖아요. 군대 지프를 불하를 해가지고 위에다가 검은 탑 씌워서 까만색으로 칠해가지고. 그걸 내가 운전해서 가다가 스카이웨이에 내려오다가 타이어가 펑크가 났어. 그 앞에 세워두고 타이어를 가니깐 초소에 무장한 군인들이 2명이 뛰어나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여기 차 세우면 안 된다고 …… 빨리 하고 가야 한다고. 그 정도로 보안이 심했다고. 지금도 여기에 최종적으로 건축허가 같은 거 해 가지구 입주 허가를 최종적으로 받으려면 군부대 승인이 떨어져야 해. 군사적으로 풀리지 않았어. 지금 그 흥천사 있잖아요. 옛날에는 신흥사라고 불렀는데 그 일대가 요릿집이었어요. 요릿집이 엄청 많았다고. 근데 그 요릿집이 뭐하는 집인가 하니 환갑잔치 생일잔치 그런 요리 주로 하는 곳이어서 주말만 되면 창하는 사람들, 국악, 가야금 하는 사람들 초청을 해서 거의 주말이면 말도 못하게 복잡했다구요. 언제부턴가 다 철거가 돼 버리고 지금 거기 아파트도 들어서고, 신흥사라는 절이 흥천사로 바뀌고 해서, 그건 역사적으로 찾아가지고. 조계종에서 한 걸 거예요. 흥천사라는 게 정릉을 보호하는 능찰이거든. 그런 거를 역사 자료를 조사를 해 가지고 조계종에서 복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잖아요. 요릿집이 많았던 이유는 그 당시 사회분위기가 시내에서 가깝고, 시내라는 개념보다는 경치도 좋고, 가깝고 이러니까 그쪽으로 요릿집들이 쫙 몰리지 않았나 하는데, 옛날에는 돈암동에 태극당 있죠 빵집. 성신여대 입구. 거기가 돈암동 전차 종점이었어요. 거기서 전차를 타면 을지로 4가까지 전차가 운행이 되었는데. 그래서 전차 타고 와서 신사 요릿집 같은 데 생일 환갑잔치 참석하기가 대중교통으로 쉬웠을 것 같아요. 이북에 5도가 있잖아요.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황해도. 지금도 내무부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내무부 소관으로 이북에 영토는 있지만 행정상으로 5개도에 도지사 제도를 상징적으로 운영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평안도 평양에서 넘어 왔어요. 그러면서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평안남도 도지사를 상당히 오랫동안 했어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지사댁이라고 그랬을 거야. 박 선생님도 지사댁 지사댁 그랬어. 조만식 선생님이라고 알아요? 조만식 선생을 정신적으로 따르면서 조선민주당이란 걸 만드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거기서 청년책임자를 알았을 거예요. 그 때 3.8선이 막혀있을 때 조만식 선생은 이북에 계시고 밀사 역할을 하시면서 서울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갈려버렸지. 조선민주당은 자그마한 정당이었는데 조만식 선생을 정신적으로 따르면서 그런 정당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거기도 관여가 돼 있었고, 을지로 3가 보면 기념관 있잖아요. 고당기념관 거기가 우리 아버지가 모금을 해가지고 지은 거야. 그 터는 옛날부터 조선민주당이 가지고 있었고. 내가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 미국 구경하시라고 미국에 사는 친구들 캐나다 사는 친척들 하고 여행하고 그랬는데, 우리 아버지는 가족들하고 관광하는 거보다 LA 뉴욕 가서 신문사 사람들을 만나고 거기서 사람들 소개 받아서 모금을 한 거야. 거기에 신경을 더 썼다고. 그렇게 모금을 많이 해서 고당 기념 사업회 건물을 우리 아버지 손이 닿아서 마무리가 다 됐어. 고당 선생의 막내아들이 나보다 나이가 2,3살 많은데 그 양반이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고당 기념 사업회에서 근무했고, 우리 아버지가 상임 이사를 쭉 하고 있었다고. 이제는 후세에 넘기시고 쉬시라고 아들들이 많이 말렸지. 지금 고당 선생의 막내아들이 기념사업회를 맡아서 하고 있어요. -박성도(남, 69,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6월 25일)-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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