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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천과 안암천, 돈암동 산 등에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
드디어 결전의 날이 도래합니다. 한용운, 오세창 등 민족대표 33인은 고종의 인산일, 즉 고종의 장례식 기간을 거점으로 독립선언을 낭독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종로의 태화관이라는 식당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후 경찰서에 자수합니다. 종로는 이미 태극기를 품고 거리로 나온 군중들로 가득했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됩니다. 성북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23일 안암리, 돈암리에서 약 200 여명, 24일에는 성북리에서 약 60 여명이 만세시위를 했고 26일에는 안암리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하며 전차에 돌을 던졌습니다. 27일에는 안암천에 약 500 여명, 돈암리 산 위에 약 50 여명이 모여 손에 태극기와 횃불, 그리고 돌을 쥐고 열렬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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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친 각계의 사람들
경술국치 후 어느덧 일본의 식민지배 10년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과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는 나라 잃은 사람들의 분노와 독립을 향한 열망을 한층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팽배했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 민족 역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또한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 역시 촉매가 됩니다. 이에 1919년 2월 1일,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합니다. 무오독립선언 혹은 대한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입니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연서자 39인 중에는 조소앙을 포함해 김동삼 등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조선 유학생들의 주도로 2·8 독립선언문이 낭독됩니다. 무려 적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장소에서요. 유학생들의 든든한 의지가 되어준 인물이 또한 조소앙입니다. 상하이로 망명해 항일 활동을 하던 그는 신규식의 밀명을 받고 도쿄로 파견돼 조선의 유학생들과 접촉, 그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3·1운동이 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 거족적 민족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한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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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919년 3월 이후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성북지역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먼저 안감천 방면에서는 1919년 3월 23일 밤 10시경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안암천)에서 피한봉 등 500명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6일에는 안감천에서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전차에 투석을 하였다. 또 3월 27일에는 안감천 부근에서 500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돈암리에서는 3월 23일 돈암리시장에서 100명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이 배포되었다. 3월 27에는 돈암리의 산 위에서 50명이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24일 성북동에서 60명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성북구 출신의 인물 중에는 성북구 주변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성북동에 거주한 중앙학교 학생 김수룡(金壽龍)은 현상윤의 권고로 서울시내에서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고향인 동래 기장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성북동 출신인 박홍식(朴弘植)은 1919년 3월 23일 밤 종로5가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암동 출신인 손진태와 피한봉은 1919년 3월 23일 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 안암천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안암동 출신인 이재성과 월곡리 출신인 정만산은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사무소(현 강북구 미아동 송천아파트) 앞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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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919년 3월 24일, 성북리에서 약 60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ㆍ근거: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 (국사편찬위원회)
1919.03.24 성북동에서 일어난 만세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