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필
1875 - 1932.01.04
인물 개인 연극영화인
영화제작자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구미의 신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1900년대 초에 이 나라의 전통예능을 공연, 보존하기 위하여 1904년 광무대(光武臺)를 인수하여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였다. 1918년에는 극장 단성사를 인수하였는데 광무대와는 달리 영화 상영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였다. 1924년에는 <장화홍련전>을 제작・상영하였는데, 이 영화의 제작진과 자본주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명실공히 최초의 우리나라 영화라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그는 1932년 사망하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길음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 일대
  • 비고: 미아리 공동묘지(묘지)

근거자료 원문

  • 박승필은 지금도 남아 있는 극장, 단성사를 경영한 영화인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875년 생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 일시는 1932년 1월 4일이다. 아래의 기사를 보면 12월 27일로 되어 있지만, 양력 1월 4일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11월 27일이 된다. 아마도 기자가 11월을 12월로 착각한 듯하다. 옛날 조선 연극・영화를 위해 애쓰던 박씨(박승필)의 면모가 역연(歷然)이 보인다. 신미(辛未, 1931) 12월 27일 졸(卒)하였다는 것만 써 있으니… (1937년 『조광(朝光)』 「歲色도 將暮!」) 박승필은 한국영화의 창시자라고 할 정도로 한국영화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08년에는 광무대를 인수하여 이곳에서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였다. 당시는 새로운 문물이 쏟아져 도입되는 시기였고, 판소리와 창극은 설 곳을 잃어가던 시점이었다. 1918년에는 단성사를 인수하여 운영했다. 당시 경성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던 극장이 하나도 없었다(광무대는 1920년에야 경성 시내로 옮겼다). 그는 광무대와 달리 단성사는 영화 상영을 중심으로 운영했다. 특히 그는 조선 영화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였으며(이 날은 영화의 날로 제정), 1924년에는 ‘장화홍련전’을 제작・상영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촬영・현상・편집된 영화였다. 이후에도 1926년에는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되는 등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과 함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26년 이후에 그의 소식은 특별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보이는 기사가 그의 사망 기사이다. 그의 화려한 업적과 달리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시피 죽은 날짜만 기록되어 있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33-35쪽
  • 정의 1875(고종 12)∼1932. 영화제작자·흥행사업가.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였고, 신교육은 별로 받지 못하였다. 구미의 신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1900년대 초에 이 나라의 전통예능을 공연, 보존하기 위하여 1904년 광무대(光武臺)를 설립,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스스로 박승필일행(朴承弼一行)을 조직하여 창무·재담·연극 등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극장 단성사(團成社)를 인수하여 경영자가 되어 당시 불길처럼 일어나던 연극계에 활기찬 무대를 제공하게 되었다. 뒤이어 활동사진 제작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하자 극단 신극좌(新劇座)를 이끌던 김도산(金陶山)에게 제작비를 제공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투 義理的仇鬪」(1919)를 제작하도록 하여 우리 나라 영화사의 기점을 이루었다. 「의리적 구투」 외에도 세 편의 연쇄극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임성구(林聖九)가 이끌던 혁신단(革新團)과 이기세(李基世)가 이끌던 문예단(文藝團)에도 자금과 무대를 제공하여 연쇄극시대의 붐을 이루게 하였다. 또, 영화제작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23년에 이르러 조선극장의 소유자인 일본인 하야가와(早川孤丹)가 1923년 「춘향전」을 만들자 큰 충격을 받고 단성사 촬영부를 설치하고 김영환(金永煥) 각본, 박정현(朴晶鉉) 감독, 이필우(李弼雨) 촬영으로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다. 이 영화의 제작진과 자본주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명실공히 최초의 우리 나라 영화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유일한 민족흥행자본을 운영하여 나운규(羅雲奎)프로덕션(1929)을 비롯하여 이필우·이경손(李慶孫) 등에게도 프로덕션을 설립하게 하여 영화제작의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박승필이 운영한 단성사는 우리 나라 영화제작의 산실이 되는 한편 구미영화를 초기작품부터 수입, 공개하여 민중에게 영향을 끼친 바 지대하다. 그는 초창기 우리 나라 연극과 영화계에 극장무대와 자금을 제공하였고, 특히 일본영화만이 득세하던 시기에 우리 나라 영화제작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우리 나라 영화제작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박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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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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