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병
1924
인물 개인 마을주민
정릉동 교수단지에 남은 유일한 서울대 교직원이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월남 후 서울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하였을 때,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이 설립되고 교수단지에 토지가 불하되자 실제로 주택을 지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그는 당시 조합원이 36명 정도였으나 불하받은 땅을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 마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하다고 기억했다. 현재 박여병 씨의 집은 34년이 되었으며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윤장섭 교수가 설계를 했다.
정릉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99, 18통~20통 (아리랑로19다길)
  • 비고: 교수단지

근거자료 원문

  • 3. 교수단지에 남은 유일한 서울대 교직원 박여병(남, 91세) 박여병 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덕원군(현재는 원산시로 편입)이다. 아버지는 세 살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러시아로 갔으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본 적이 없고 사진으로만 봤다. 당시 과수원을 하며 살았고 원산농업학교를 다녔다. 박여병 씨가 월남한 것은 20대 중반으로 24~25세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과수원 농사를 지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으며 소위 부르주아로 불리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박여병 씨는 반공운동을 했다. 당시 지인이었던 독립운동가 강기덕(1886~?: 3.1운동 48인 중 한 명)의 아들 강기만으로부터 피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 형제가 없었던 박여병 씨는 홀어머니를 이북에 두고 월남하게 된다. 그 후 부모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기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과 추석에 차례만 지내고 있다. 거기서 공산군에 잡힐 수는 없잖아. 빨리 피하라고 혹시 이름을 얘기하면 알지도 몰라 강기덕 씨라고 있었어. 독립운동하는 그 분 자제가 강민기씨인데 역사에 보면 강기덕 씨라고 있을 거예요. 강기덕 씨 자제분이 나보다 8살이 위인데 내려와서 “자네 빨리 피해야 되겠네” 그러더라구. 반일운동을 내가 참여를 했지만 해방 후에는 반공운동을 했거든. 빨리 가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불쌍하지. 어머니는 거기(이북) 남아 있었지. 나만 피해 왔지. 그니까 나 3살 때 아버지는 반일운동하다가 러시아로 가고 나 20 몇 살일 거예요. 그럼 그 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월남 후 서울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할 당시 아내인 이정희씨를 만났다. 중매결혼이 성행하던 당시 연애를 하고, 6.25전쟁이 끝난 후 결혼을 하여 안암동에서 살았다. 박여병 씨가 30살, 이정희씨가 24살 때의 일이다. 회갑이 60년인데 결혼하고 회갑만큼 살았어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무주임을 역임하던 시절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이 설립되고 교수단지에 토지가 불하된 후, 실제 주택을 지어 현재까지 거주하는 유일한 초기 조합원으로 남아 있다. 처음 단지가 조성될 때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청와대와 가까웠던 정릉 주변은 수도경비사령관 소속의 군사보호지역으로 단지 조성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토지를 불하받은 다음 대부분 땅을 팔고 실제 집을 짓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으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은 후 실제 마을에 거주한 경우는 드물다. 박여병 씨는 당시 조합원이 36명 정도였으나 불하받은 땅을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 마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하다고 기억했다. 박여병 씨와 건축학과의 윤장섭 교수가 가장 오랫동안 마을에 산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는 윤장섭 교수가 마을에 거주하지 않으므로 박여병 씨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교수단지 내의 유일한 서울대 교직원인 셈이다. 주택조합이 설립될 당시 물리대학장이 이사를 하고, 박여병 씨는 상무이사를 했다. 당시 박여병 씨가 불하받은 땅은 두 필지(120평)였다. 불하받을 당시 가격은 평당 5만 원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원래 불하받은 땅은 가로로 길게 되어 있어 마당으로 활용하기에 좋지 않았다. 마침 아래쪽 땅을 불하받은 조합원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그 땅을 구입하게 되어 현재까지 터를 일구며 살고 있다. 현재 박여병 씨의 집은 34년이 되었으며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윤장섭 교수가 설계를 했다. 교수단지를 불하받을 당시는 강남개발이 한창이던 시절로, 현재의 위치에 단지를 조성한다고 하자 직원들도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안암동에 살던 박여병 씨는 이미 불하받은 땅이 있고, 여건상 정릉에서 사는 것이 자녀들의 교육상 더 좋다고 판단했다. 당시 “강남에 땅을 샀으면 더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정릉에 오래 살았으니 이곳에서 살다 갈 것이라고 부부는 말했다. 박여병 씨 구술 문화재 관리국인데 지금 그때 문화재 관리청인데 예산이 모자란다. 그래서 이걸 산을 사가지고 우리가 택지 조성을 한 거야. 당시 서울대가 혜화동에 있었거든. 지금 서울대병원, 한국방송통신대 자리, 이걸 불하를 받았지. 이거를 살 때는 우리학교 직원들도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었어. 여기 집이 저 밑에 가서 한두 개 있었고 쭉 다 집이 없었거든. 이 동네는 그래서 저기 사서 어떻게 하려 그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학교 대학에 건축과도 있고 토목과도 있고 거기 졸업생들 동원해서 축대 쌓는 것 건축하는 사람들 해서 해라 축대도 이때껏(이제까지) 축대 무너진 데가 없을 거예요. 정기적으로 도로를 닦았어. 큰길은 6m 그리고 저 뒷길은 4m해 가지고서 규칙적으로 만들었어. 그때는 서울대학 직원들이 신청자가 많으니까 추첨을 했는데, 다 교수단지가 아니야. 저 아래 큰집 있잖아. 거기까지만 불하를 받은 거예요. 우리가 여기 택지조성을 했는데 서울대학교만 해주고 안 해줄 수 없잖아. 딴 사람들도 허가를 받아가지고서 저 아래까지. 능 있는 데까지 쭉 집이 다 들어서게 됐어. 우리 한 다음에. 그 때만 해도 택지조성을 하니까 저 정보부단지가 있지. 정보부가 날아가는 새도 떨구는 덴데 그것도 허가를 못 맡은 거 같아. 우리 허가를 맡으니까 우리 허가해 주고 안 해줄 수 없잖아. 여기 서울대학에서 건축허가를 받으니까 거기서도 정보부단지도 허가를 받은 거야. 그때 당시에는 경비 사령부에 허가를 받아야 돼. 여기 청와대 보호 상 여기 건축허가를 그냥 못 받아. 수도경비 사령관의 동의가 있어야지. 그리고 2층 이상은 안 되게 돼 있어. 그 위에 스카이웨이가 생기면서 빌딩도 생기고 했지마는 그때 당시에는 2층 이상은 허가를 못해줘. 난 시야가 마당이 좀 있어야 되니까 요 앞에 집에 바로 120평인데 거기다 집을 지었는데 의대 차철환 교수가 팔겠대. 날 보고 여기 사니까 좀 팔아달라고 그러면 지금 시가대로 우리가 얼마씩에 파니까 내가 사겠다 그럼 더 좋다고 그럼 내가 사니까 그래서 이거 사가지고서 한 필지는 그냥 마당으로 쓰는 거야. 다른 조합원들은 땅만 샀다가 집을 안 짓고 이사를 가기도 했어요. 우리는 자녀들 학교를 다닐 때라 이사를 가지 않았어요. 여기 집이 없을 땐데 정말 밤엔 무서웠지. 택지만 있는데 이게 다른 데보다 견고히 한 거예요. 토목과에서 축대 쌓고 한 것도 다 와서 감독도 하고 협조도 하고 그래서 축대도 딴 데도 정말 40, 50년이 지나도 무너진 집이 없어. 이게 두 필지 120평이에요. 60평은 마당이지. 두 필지지. 60평짜리 두 필지인데 우리가 여기 이 앞집에 살았어요. 앞집인데 이렇게 가로로 있기 때문에 마당은 좁아 시야가 좋지 못해요. 내가 “이왕 산 바에 마당을 넓게 시야도 좀 넓고 꽃도 심고 해야겠다” 해서 그걸 팔아가지고 여기를 샀어. 마침 여기 땅 가진 사람이 팔고 이사를 간대. 그래서 거기 살면서 건축을 해서 그걸 팔아가지고서 이걸 산 거야. 서울대 주택조합 조합원이야 많았는데 여기 신청한 사람은 아마 10여 명 됐을 거예요. 여기 했는데 팔아가지고 딴 데 간다고 뭐 딸네 집 간다 뭐 어디로 간다 이러면서 다 이사 갔어. 그때 여기 안 왔으면 아마 더 부자가 됐을 거야. 그 때 강남이라는 데가 없었거든. 강남을 개발한다 그러더라고. 지금은 그때 정릉으로 이사 왔고 애들도 다 컸고 여기서 살다 죽어야지. -박여병(남, 91,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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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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