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희
1918 - 2008
인물 개인 문인
소설가이다. 해방 후 월남하여 잡지 『자유세계』 창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투영한 작품과 역사의식을 고취한 장편 역사소설을 발표하였다. 필화 사건을 겪으며 붓을 꺾고 산골에서 생활하던 박연희는 김환기의 소개로 ‘정음사’의 창간자를 알게 되며 첫 소설집 『방황』(1957)을 발간한다. 1960년에는 시인 조영암의 소개로 정릉동 289번지로 이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증인」(1956), 「여명기」(1978), 「주인 없는 도시」(1988)와 20여 년 넘게 산 정릉 이웃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하촌일가』(1978)가 있다.
정릉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朴淵禧
  • 이명칭: 하촌(霞村)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289번지

근거자료 원문

  • 함경남도 함흥의 산촌에서 태어난 박연희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시인 윤동주와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 된 용정 대성중학교에 진학해 우리 역사와 문화, 언어를 배웠다. 학교를 다니며 역사인식을 키웠고, 일제에게 핍박받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글에 담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그러나 집안사정으로 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 과수농사를 도와야 했다. 사회에 나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길 원했지만 책으로 지식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었고,‘ 함남민주청년회’에 들어가 독립한 조국의 앞날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박연희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소련의 사회주의 정책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월남을 결심한다. 내가 1918년에 태어났으니, 너무나 불행한 시대였다. 그리고 너무나 암울한 시대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나는 그 암울한 시대를 좀처럼 잊을 수 없다. 어쩌면 그 암울한 시대에서 받은 영향력이 나의 문학의 일부 성격을 모름지기 형성시켰는지도 모른다. - 박연희, 『주인 없는 도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이 1951년‘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국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때, 독재체제를 강행하는 정권을 향한 불만이 커졌고 문인들은 글로써 대항한다. 1952년 창간된 《자유세계》는 자유당 정책을 비판하는 잡지로 야당의 정치지도자였던 조병옥이 중심이 되어 편집장에 임긍재, 편집위원에 박연희, 주요섭 등이 참여하였다. 정치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잡지에 잇달아 관여하며 박연희는 자신의 정치의식을 반영한 소설을 발표한다. 대표작「증인」(1956)은 자유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해고된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 하숙을 들인 학생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범으로 몰려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이다. 자유당의 독재체제에서 인권마저 무시당하며 사는 사람들은 반공주의만이 자신의 순결함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소설에서는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불안한 사회를 꼬집었다. 이 작품은 ‘대담할 정도로 정치문제에까지 파고든 작품’이라 평가받을 정도로 정치적 비판의식을 여과 없이 담아냈다. 월남할 때 데려온 딸이 소녀가 되고, 그 아래로 사남매가 태어났다.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1960년 가을 적선동에서 정릉동 289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시인 조영암이 소개하였는데, 집 아래로는 배 밭이 펼쳐져 과수원집이던 고향을 떠올리는 풍경에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ㄱ’자 모양인 작은 초가집 바깥에는 나무판으로 담을 쳤고, 뒤로는 삼십 평 남짓한 다락밭이 있어 감자, 옥수수, 묘목 따위를 심었다. 안방과 첫째 아들이 쓰던 작은방 사이에 부엌이 있고, 박연희가 서재로 쓰는 건넌방과 안방 사이에는 마루가 있었다. 마당에는 이웃인「순애보」의 작가 박계주가 선물한 문조 한 쌍이 지저귀고, 때가 되면 대추와 모과가 무르익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정릉 집으로 이사 온지도 벌써 20년이 훨씬 넘었다. 누구의 땅인지도 모르고 사서 들었다. 무허가 초가집이었다. 이사 오던 해에 새로 지붕을 이었다. 이틀 후엔가 비가 와서 함츠르르 젖어 낙수 물이 떨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고향을 생각했다. 그렇게 시골 냄새가 풍기고, 하루 종일 햇볕이 드는 남향 받이여서 아늑했다. 집 앞으로 감자 밭이 길게 가로 질러 있는 사이를 우리 집으로 출입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다. 뒤꼍은 아예 담도 없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소박하나 집에 달린 밭이 꽤 넓었다. 이북 고향에다 두고 온 과수원 어느 언저리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다웁게 생각되었다. - 박연희,「 아이들과 과일나무」, 1981 - 박연희는 호탕한 성격에 술과 친구를 좋아해 집에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시인 김수영, 황염수가 오는 날이면 정릉골짜기에서 닭백숙을 안주 삼아 밤을 새며 이야기 했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 내외는 친척처럼 가까이 지냈다. 함남 원산에서 유년기를 보내 ‘월남작가클럽’에서 만난 시인 구상은 오랜 시간 각별하게 지낸 친구였다. 박연희가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대부가 되어주고, 큰아들이 혼인할 때 주례를 섰다. 정릉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동아일보에 다니면서 소설 「고향」(1959), 「개미를 쌓은 성」(1962) 등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가난하고 피폐한 사회 속에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작중 인물들은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상을 그려내고, 작가의 시각을 대변했다. 박연희는 계속해서 자유당과 군사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고 올바른 민주주의와 시민정신을 지향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문학조차 검열의 대상으로 여겼고, 1962년 동아일보의 연재소설 「여수旅愁」의 한 부분을 문제 삼아 책임자인 박연희를 문책했다. ‘우리나라가 신탁통치를 받았더라면 중립국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등장인물 송진우의 발언 때문이었다. 권고사직으로 동아일보를 떠난 후 소설가 염대하의 주선으로 ‘한국전력 공보실’에 들어갔다. 「여수」의 작가 박계주는 필화사건 후 경제적 궁핍과 연탄가스 중독으로 4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군인과 마주칠 때마다 불안감,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낀 박연희는 결국 특별요양소 근무를 지원해 강원도 화천으로 떠난다. 내가 60년대, 한국전력에 취직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나한테는 무척 괴로웠던 시절이었다. 끝내는 견디다 못해 인사부에 자원하여, 한전에서 경영하고 있던 화천요양소 현지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두메산골이어서 누구나 가기를 꺼렸던 곳이다. 게다가 결핵환자들을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서울에다 식구를 둔 채, 고생을 하러가는 심정으로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어느 진눈깨비 내리던 날. - 박연희,「 잊혀지지 않는 일들」- 붓을 꺾고 산골에서 생활하던 중 화가 김환기를 통해 알게 된 수필가이자 ‘정음사’의 창간자인 최영해의 도움으로 1950년대 중반부터 쓴 작품을 모아 첫 소설집 『방황』(1967)을 발간한다. 이후 직장 생활을 접고 정릉 집으로 돌아와 역사소설 집필을 시작한다. ‘역사를 통해 현대를 조명하는데 역사소설의 뜻이 있다’고 생각한 박연희는 ‘통치자가 백성을 배신하면 민중항쟁이 불가피하다’는 역사의 흐름을 통해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과 자문을 받아 1970년대 중반부터『홍길동』, 『하촌일가』등 장편역사소설 을 발표하였다. 아마 1967년 초라고 기억된다. 뜻밖에도 어느 일요일, 영해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미 발표된 작품 중에 단편집 한 권이 될 분량을 갖고 만나자고 했다. 어리둥절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좋은 시절이 돌아올 때 까지 펜을 잡지 않으리라고 마음먹고 문학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조병화 시인하고 갔었던 영해선생의 혜화동 자택을 찾았다. … 그해 9월에 나의 첫 소설집‘방황’이 한국 단편문학선집에 끼어 정음사 판으로 출판되었다. 그저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 암울한 시절에 ‘방황’이 햇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출판을 계기로 영해 선생이 매번 불러 단 둘이서 온갖 낚시터로 돌아다녔다. - 박연희,「 낚시터를 방황했던 최영해」- 글을 쓰는 틈틈이 취미로 소설가 오영수, 손진섭, 시인 조병화 등 친구들과 소양강, 충주호 등지로 낚시 여행을 다닌다. 낚시를 다니며 겪은 일화를 조선일보와 《월간 낚시》에 연재하면서 문단에서 알아주는 낚시꾼으로 통해, 명륜동에서 정릉동으로 이사 온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낚시를 즐기는 박연희에게‘주작’낚싯대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마해송이 세상을 뜬 것을 아쉬워하며 <증贈마해송 선생>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간직하였다. 1983년 정릉 생활을 정리하던 박연희는 청수장 맞은편에 있는 손가정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전락』을 발표한다. 이 작품을 끝으로 불광동으로 이사하여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황제』, 『송도의 봄』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집필하고, 친구들과 낚시를 즐겼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어디까지나 내 분신이면서 지금도 내 주변에 있는 것으로 믿고 싶은 떼어 놓기 어려운 정’이라고 한 박연희. 그는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사회가 역사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올바로 나아가길 바라며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보듬으며 작품으로 사회에 말을 건 작가이다. 언론통폐합이 끝나 군사정권이 나치즘을 닮아가고 있을 무렵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시절 언론말살정책에 따라 표현의 자유가 동결돼 작가들도 글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역사소설을 통해 오늘의 사회를 조명해보고자 이 작품을 썼다. 어느 시대든 인간 해방이 문학의 길이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 인간적인 민주주의를 뜻한다. 통치자가 백성을 배신하면 민중항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역사에 나타난다. - 박연희의 말 -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42-48쪽
  • 박연희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46년 《백민》기자, 단편 ⌜쌀⌟로 등단 1948년 《대조》편집국장 1950년 《문학》편집국장 1952년 《자유세계》편집위원 1957년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1962년 한국전력 공보실 편집차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3년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 2008년 작고 대표작품 『삼팔선』, 『고목』, 『증인』, 『방황』,『 탈출기』,『무사호동』, 『홍길동』, 『하촌일가』, 『밤에만 자라는 돌』, 『황제』, 『민란시대』, 『송도의 봄』등 상훈 대한민국예술원상(1983), 3.1문화상(1996), 은관문화훈장(2004)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49쪽
  • 소설가이다.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투영한 작품과 역사의식을 고취한 장편역사소설을 발표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잡지 《자유세계》 창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필화 사건을 겪으며 붓을 꺾고 산골에서 생활하던 박연희는 김환기의 소개로 ‘정음사’의 창간자를 알게 되며 첫 소설집 『방황』(1967)을 발간한다. 1960년에는 시인 조영암의 소개로 정릉동 289번지로 이사하였다. ㄱ자 구조의 작은 초가집에 푸성귀를 심어 먹을 밭이 딸려 있는 집이었다. 박계주, 김수영, 황염수, 구상 등과 어울렸고, 낚시를 좋아해 오영수, 조병화 등과 낚시 여행을 다녔다. 20년 넘게 살며 정릉 이웃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하촌일가』를 집필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30쪽
    『방황』의 발표시기는 1957년으로 본문의 '『방황』(1967)'은 오타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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