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사건 사회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기 전, 안암동에서 '일한신궁(日韓神宮)' 건설이 추진되었던 사건이다. 1905년 일제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며 '보호정치'를 시작하자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친일파를 종용하여 신궁을 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궁건설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신궁 조성 예정지는 당시 명칭으로 '한성부 숭신방 안암동 중리'의 어좌봉(御座峰)으로 현재의 안암동1가에 속하는 지역이다. 면적은 무려 1,608평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이곳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이던 원빈(元嬪) 홍씨의 무덤인 원빈묘가 있던 작은 언덕의 서쪽 중턱이었으며며 훗날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곳이기도 하다. 신궁은 본전(本殿)으로서 오른쪽부터 ‘단군천황(檀君天皇) 정전(正殿), 천조황(天照皇) 정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정전’을 배치하고, 다음에 신전 앞뜰의 오른쪽에 이안전(移安殿)과 왼쪽에 배설청(排設廳)을 신축하고자 하였으며 전면 우측에는 찰전(札殿)과 왼쪽에 수복청(守僕廳) 그리고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을 건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어느 시점에 공사가 중단되어 안암동 신궁 건설은 무산되었다.
안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安岩洞 日韓神宮 建築 論難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사건 사회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124번지 일대

근거자료 원문

  • 2. 安岩洞「日韓神宮奉敬會」전말 安岩洞의 옛 소속은 高陽郡 崇仁面 安嚴里였으며 大韓帝國時代에는 漢城府 東部 崇信坊 安嚴洞이었다. 1905년 11월에 서울에 統監府라는 것이 설치되어 이른바 保護政治라는 것이 시작되자 당시 서울에 와있던 일부 日本人들은 제1급 親日派들을 종용하여 「이제 韓國은 어차피 日本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 일본과 한국은 一體가 되어야 되는데 그것을 상징하는 神社를 만들기로 하자. 그 神社에는 조선의 始祖인 壇君과 일본의 始祖인 天照大神 그리고 朝鮮王朝를 건국한 太祖의 3柱로 하고 神社의 이름은 日韓神宮이라고 하자. 이 神宮建立에는 조선사람들이 앞장서서 함으로써 日本政府에 충성심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부추긴다. 당시 日本人들에게 붙어서 榮譽와 權力·金力을 얻으려고 血眼이 되었던 親日人士들이 여기에 앞장서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神宮의 위치와 면적 神宮造營의 예정지는 漢城府 崇信坊 安嚴洞 中里의 御座峰이며 현 安岩洞 124번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그 면적은 1,608평 6합이었다. 이 땅은 제22대 王 正祖의 後宮이었던 元嬪 洪氏의 묘였던 元嬪墓가 있던 작은 언덕 西端의 중턱이었으며 훗날 敦岩地區 구획정리사업으로 부지의 西半에는 새 道路가 났고 도로의 서쪽은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다. 당시에 이 일대는 松林이 우거져 保安林指定地였는데 神宮地域 예정지 일부가 保安林에 속하고 있었기때문에 당시의 農商工部 大臣 趙重應은 隆熙 3년(1909년) 9월 4일에 이 保安林 중에서 692평을 해제하고 같은 해 10월 6일자 官報에 이를 告示하였다. 당시의 한국정부는 保護政治의 후기였기 때문에 모든 政務는 일본인으로 배치된 次官들이 거의 전행하였고 이 日本人次官을 통하여 사전에 統監府의 지도를 받거나 양해를 얻은 후에 시행된 것이므로 10월 6일자 官報의 기사가 9월 4일 날짜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日韓神宮 造營의 件은 미리 統監과 日本人 次官들 그리고 舊韓國政府의 各 大臣사이에서 公式으로 논의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官報에 게재된 告示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農商工部 告示 제30호 漢城府 東部 踏十里 安嚴洞 民有森林 面積 貳反參畝貳步 右 保安林을 解除함 隆熙 3년 9월 4일 農商工部大臣 趙重應 2) 神嚴의 設計와 神位 神殿설계의 개요는 우선 本殿으로서 오른쪽(東方)부터 檀君天皇 正殿, 天照皇 正殿, 太祖高皇帝 正殿의 三殿을 배치하고 다음에 神殿앞뜰의 오른쪽에 移安殿을, 그리고 왼쪽 排設廳을, 그 前面(南方) 오른쪽에 札殿, 왼쪽에 守僕廳, 正面에 三門을 건립하도록 예정하였다. 그 밖에 檀君碑閣·天照皇碑閣·太祖碑閣·世宗王碑閣 등 4개의 기념비각, 神宮事務所·神宮婦人事務所 등의 건립을 예정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廟殿으로서의 體制를 완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神位는 다음의 세 개가 예정되었다. 大朝鮮開國 大始祖 檀君天皇 神位 大日本開國 大始祖 天照大神 神位 大韓開國太祖至仁啓運應天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神位 3) 上陳文과 諸規定 神宮내 3개 本殿의 上棟文 草案도 아주 長文으로 작성하였고 焚香式의 순서도 정했으며 祭享의 禮式은 四時의 大祭는 太廟의 禮에 따르고 春秋의 大亨은 文廟(成均館)의 例에 따라 매년 3월·9월의 上丁日에 거행하도록 하고 祭日당일의 初獻官·終獻官·執禮·大祝·典祀官 기타 등등의 制度도 모두 정했으며 祭器라든가 일반 亨需는 太廟(宗廟)의 例를 따르도록 하였다. 또 隆熙 3년(1909년) 8월 21일 자로 3章 24개 조문으로 된 神宮奉敬會建築所 規則, 9개 조문으로 된 別錄建築規則, 2개 조문으로 된 編輯規則 그리고 婦人入許門碑規則 등을 제정하였다. 4) 事業發起人 이 사업의 발기인은 아래와 같으며 이밖에 監督·監童 등을 합하여 216명을 선정했다고 한다. 總 議 長 李 埈 鎔 總 副 議 長 李 址 鎔 上 議 長 閔 泳 徵 上 副 議 長 尹 逈 求 公 事 議 長 金 昇 圭 副公事議長 尹 震 求 趙 卨 衍 贊 成 議 長 高 橋 久 司 尹 瀗 閔 丙 漢 李 奎 鎭 沈 九 澤 總務監督長 韓 成 奎 總 監 督 長 鄭 殷 采 副總監督長 鄭 秉 源 會計監督長 張 英 喆 掌財監督長 許 起 龍 財務監督長 金 興 演 基址監督長 金 泰 淵 副監督長 韓 殷 奎 編輯監督長 金 大 圭 編輯副監督長 田 文 珏 또 이 神宮건립에 관한 附帶事業도 계획하여 總務部·禮典部·敎育部·實業部·財務部의 5부를 설치하여 총 92명으로 이를 조직하였다. 이상은 당시의 日韓神宮奉敬會建築所가 발행한 「神宮建築誌」에 기재되어 있는 계획의 개요인데 그후 이 계획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된 채 중단되었으니 그것이 중단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훗날(1941년) 京城府가 京城府史 제3권을 발행하면서 당시 安岩町 122번지에 거주하여 당시의 상황을 실지로 목격했다는 洪春成이란 노인(1939년 당시 75세)에게 물어보았더니 「神宮建築을 위해서 많은 量의 石材·木材가 운반되어 와서 이곳에 퇴적되어 있었으나 資金의 不足으로 중지했다고 들었다」는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직책에 거명된 자는 1939년 당시에는 모두 作故하였는데 오직 贊成議長이었던 閔丙漢만은 신장병으로 다년간 病中에 있었으나 아직 생존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문의한 즉 「資金이 달려서 중지했담」고만 답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城北區誌의 일부를 집필중인 필자의 추측으로는이 神宮에 奉祠될 3神位중에 日本神은 天照大神뿐이고 나머지 2개의 神位가 檀君과 朝鮮國의 太祖였다는 점에 일본의 神社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대하였고 伊顧博文 統監등을 통하여 공사진행을 중지시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위에 거명된 자들은 당시에 모두 일급 親日派였고 또 개중에는 李埈鎔(興宣大院君의 손자)과 같이 그 이름만 빌려준 자도 있겠으나 거의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日帝에 아부하여 權勢의 언저리에 있고자 한 자들이었다. 1910년에 韓日合邦이 되자 그해 10월 7일자로 다수의 조선인이 貴族이 되었으나 乙巳五願의 하나였던 李址鎔은 伯爵 勳一等을 받았고 閔泳徽 는 子爵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合邦功勞者로서 모두가 日本政府로 부터 이른바 「恩眼金」이라는 多額의 돈을 받아 日帝초기에 好衣好食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11-115쪽
  • (2) '일한신궁' 건축 논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기 이전에 안암동 지역에서는 한때 '일한신궁(日韓神宮)' 건설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일제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가운데 '보호정치'를 시작하자,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의 친일파를 종용하여 신궁을 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조선의 친일적 인사들은 신궁건설 사업의 추진에 앞장을 서게 되었다. 신궁 조성 예정지는 당시 명칭으로 '한성부 숭신방 안암동(安巖洞) 중리'의 어좌봉(御座峰)이며, 현재로는 안암동1가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 면적만 해도 1,608평에 달할 정도로 일한신궁의 부지 규모는 상당하였다. 원래 이곳은 정조의 후궁이던 원빈(元嬪) 홍씨의 무덤인 원빈묘가 있던 작은 언덕의 서쪽 중턱이었으며, 훗날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곳이기도 하였다. 당시에 이 일대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보안림(保安林)으로 지정되었는데, 신궁 예정지 일부가 보안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 권중응(權中應)은 1909년(융희 3) 9월 4일에 이 보안림 가운데 692평을 해제하고 같은 해 10월 6일자 《관보(官報)》에 이와 같은 사실을 고시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정무에는 일본인들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사전에 통감부의 지도를 받거나 적어도 이들의 양해를 얻은 후에 시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지가 마련되자 신궁 설계를 위한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본전(本殿)으로서 오른쪽부터 ‘단군천황(檀君天皇) 정전(正殿), 천조황(天照皇) 정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정전’을 배치하고, 다음에 신전 앞뜰의 오른쪽에 이안전(移安殿)과 왼쪽에 배설청(排設廳)을 신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 전면 우측에는 찰전(札殿)과 왼쪽에 수복청(守僕廳) 그리고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을 건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 외에도 4개의 기념비각을 비롯하여 신궁 사무소 등을 조성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준비가 이행되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신궁 조성은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불명확하나 1941년 당시 안암정(安岩町) 122번지에 거주하며 이때의 상황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노인의 진술에 의하면 “신궁 건축을 위해서 많은 양의 석재와 목재가 운반되어 와서 이곳에 쌓아두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공사를 중단하였다.”라고 한다. 이에 대해 《성북구지》 집필자는 본 신궁에 봉사(奉祠)될 3신위(神位) 중에 일본의 신은 천조대신(天照大神)뿐이고 나머지 2개의 신위가 단군과 태조 이성계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신사 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대하여 공사 진행이 중단되었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일본인들이 본 지역에 신궁 건설을 계획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안암동은 향후에도 개발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입지조건을 가졌다고 판단된다.
    강제훈, 서홍석, 이지훈, 조용철, 황선익, 2018, 서울 서울 동(洞)의 역사 성북구 제3권(보문동·안암동·종암동), 246-24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장지희
  • 작성일: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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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