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영
1870 - 1948
인물 개인 종교인
안암동 개운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18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세에 출가하였으며, 1896년 전라북도 순창에 위치한 구암사를 시작으로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에는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 혁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했을 때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다. 1926년에는 안암동에 위치한 개운사 내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그가 머무를 당시 개운사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리나라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모이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전라북도 정읍에 위치한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안암동
  • 대원암
  • 대원암 전경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朴漢永
  • 이명칭: 정호(鼎鎬), 호: 석전(石顚)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종교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5가 157 (개운사길 73)

근거자료 원문

  • 3) 종교인 (1) 박한영 박한영의 자는 석전(石顚), 호는 한영(漢永), 법명은 정호(鼎鎬)·영호(暎鎬)이며, 18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출가하였으며,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한 뒤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 혁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했을 때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의 전통론을 내세워 연합조약을 무효화시켰다. 그는 당대의 문인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이광수·조지훈·김달진 등을 지도했으며, 서정주·최남선·정인보·서정주 등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1913년에는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 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가 되었다. 1926년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의 산내 암자인 대원암(大圓庵)에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불교계의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지도하였고, 1931년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정읍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최남선이 정리한 《석전시초(石顚詩抄)》와 《석전문초(石顚文抄)》 등 9권의 책에 시, 논설, 수필 500여 편도 남아 있다. 금봉(錦蜂)·진응(震應)과 함께 근대 한국불교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받았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노장 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서법(書法)까지도 겸통한 대고승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강제훈, 서홍석, 이지훈, 조용철, 황선익, 2018, 서울 서울 동(洞)의 역사 성북구 제3권(보문동·안암동·종암동), 240-241쪽
  • 개운사는 조선이 건국된 지 5년이 흐른 1396년, 왕사인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영도사였으나 조선 중기 개운사로 이름을 바꿨다. 개운사는 조선 초기부터 이어져 온 찬란한 역사도 품고있지만, 근대 불교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 무척 중요하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의 대석학인 석전 박한영 스님이 머무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90년대까지는 지금은 김포로 이전한 중앙승가대학이 있었다. (중략) 개운사를 빠져나와 개운사의 암자이자 석전 박한영 스님이 머물렀 던 대원암으로 향한다. 가는 길 좌우에 우후죽순처럼 걸려 있는 하숙집과 원룸 광고가 잠시 잊었던 사실을 문득 떠오르게 한다. 아, 대학가였지. 개운사 경내의 향취에 젖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먼발치에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보인다. 저 것이 필시 석전 박한영 스님이 머물렀던 대원암일 터. 가까이 다가가보니 기다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띈다. ‘탄허스님께서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신 곳’ 자신의 입적일을 정확히 예언했다던 탄허 스님이 이 곳에 머물렀었구나. 아직 살아계셨다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숫자 여섯 개만 알려달라고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원암 뒤편에도 탄허스님 표지판과 꼭 닮은 것이 하나 세워져 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의 연구실이 있던 곳’ 하지만 현재 연구실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텃밭 한 켠에 표지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95-197쪽
  • 개운사는 조계종 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로 있지만 일제강점기부 터 불교개혁과 진보의 흐름을 주도해 온 종단개혁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독립과 불교혁신을 위한 승려 단체인 만당이 이곳에 자리 잡고 불교 내 독립운동과 혁신운동을 주도했다. 1911년 한국 불교를 일본의 조동종에 합류시키려는 시도를 오월성 · 한용운과 함께 저지한 근대의 고승이자 석학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이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31쪽
  • 대원암大圓庵 대원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개운사의 산내 암자이다. 조선 후기인 1845년(헌종 11)에 지봉 우기智峰 祐祈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 불교계의 석학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이 이곳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그가 주석하던 당시의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수많은 출가 제자들과 더불어 석정 신석정 · 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 제자 및 동경 삼걸로 불리던 벽 초 홍명희 · 춘원 이광수 ·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백화 양건식 · 산강 변영만 · 가람 이병기 · 위당 정인보 · 범부 김정설 · 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석전의 가르침을 구했다. 석전의 입적 이후 1970년대에는 탄허 택성呑虛 宅成이 주석하면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의 역경 사업에 종사하였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36-23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장지희
  • 작성일: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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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운사
    이야깃거리
    개운사
    분류: 장소, 유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