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교인
(1) 박한영
박한영의 자는 석전(石顚), 호는 한영(漢永), 법명은 정호(鼎鎬)·영호(暎鎬)이며, 18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출가하였으며,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한 뒤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 혁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했을 때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의 전통론을 내세워 연합조약을 무효화시켰다.
그는 당대의 문인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이광수·조지훈·김달진 등을 지도했으며, 서정주·최남선·정인보·서정주 등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1913년에는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 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가 되었다. 1926년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의 산내 암자인 대원암(大圓庵)에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불교계의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지도하였고, 1931년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정읍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최남선이 정리한 《석전시초(石顚詩抄)》와 《석전문초(石顚文抄)》 등 9권의 책에 시, 논설, 수필 500여 편도 남아 있다. 금봉(錦蜂)·진응(震應)과 함께 근대 한국불교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받았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노장 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서법(書法)까지도 겸통한 대고승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개운사는 조선이 건국된 지 5년이 흐른 1396년, 왕사인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영도사였으나 조선 중기 개운사로 이름을 바꿨다. 개운사는 조선 초기부터 이어져 온 찬란한 역사도 품고있지만, 근대 불교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 무척 중요하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의 대석학인 석전 박한영 스님이 머무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90년대까지는 지금은 김포로 이전한 중앙승가대학이 있었다.
(중략)
개운사를 빠져나와 개운사의 암자이자 석전 박한영 스님이 머물렀
던 대원암으로 향한다. 가는 길 좌우에 우후죽순처럼 걸려 있는 하숙집과 원룸 광고가 잠시 잊었던 사실을 문득 떠오르게 한다. 아, 대학가였지. 개운사 경내의 향취에 젖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먼발치에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보인다. 저
것이 필시 석전 박한영 스님이 머물렀던 대원암일 터. 가까이 다가가보니 기다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띈다. ‘탄허스님께서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신 곳’ 자신의 입적일을 정확히 예언했다던 탄허 스님이 이 곳에 머물렀었구나. 아직 살아계셨다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숫자 여섯 개만 알려달라고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원암 뒤편에도 탄허스님 표지판과 꼭 닮은 것이 하나 세워져 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의 연구실이 있던 곳’ 하지만 현재 연구실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텃밭 한 켠에 표지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박수진, 백외준, 민문기, 김영미, 최호진, 최보민, 고종성, 김민성, 2017,
보문동∙안암동, 195-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