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신방
장소 인문지리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선·삼선·성북·안암·정릉·종암동 일대가 이에 속하였다. 한성부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루어졌는데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이에 해당하는 영역을 한성부가 단독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1396년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었는데 방은 공식적으로 조선 전기 한성부의 가장 하위 행정 조직이었으며, 이때부터 5부 중 동부(東部)에 숭신방(崇信坊)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숭신방이 숭신면(崇信面)으로 변경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숭신면은 3년 뒤인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崇仁面)에 편입된다.
돈암동 삼선동 성북동 정릉동 안암동 동선동 종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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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2) 조선시대 안암동 일대의 행정 연혁 안암동의 행정 연혁은 조선시대 들어와서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1395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였다. 한성부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루어졌는데, 성저십리는 대체로 동쪽은 중랑천, 남쪽은 한강, 서쪽은 홍제천, 북쪽은 삼각산을 경계로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넓은 영역을 한성부가 단독으로 통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1396년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구획을 나누고 방명표(坊名標)를 세웠다. 여기에서 방은 조선 전기 한성부의 공식적인 최말단 행정조직이었다. 행정 편제상으로는 방의 하부에 이(里)가 존재했지만 이는 단순한 호(戶)의 편제 단위로만 기능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계(契)가 생겨나 행정 조직으로 기능하기 전까지 한성부 5부(部)-52방(坊)으로 이어지는 행정 체계가 한성부 주민을 통제하는 기본적인 행정 편제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부(東部)에 숭신방(崇信坊)이 보인다. 조선시대 한성부 방의 하부 행정단위에는 이(里)·동(洞)·계(契)가 있었다. 이는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고려 말부터 지방 행정단위로 등장하였다. 지방에서의 이는 중요한 행정 단위로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으나 한성부에서는 조선 전기에 존재했다가 조선 후기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이는 한성부민의 호적 표기에 반드시 기입해야 하는 호구 편제 단위였으나 조선 후기에 서울이 상업도시로 성장하고 인구가 중가하면서 행정 편제상에서 사라졌고, 부분적으로 마을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동과 유사하게 잔존하였다. 동은 언제부터 행정 구역으로 등장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동이란 원래 동혈(洞穴)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里)와 촌(村)과 같은 마을의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이 하나의 지명으로 기록된 사례는 고려 말부터 보인다. 동이 한성부 하부의 행정 조직으로 채택된 것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이후가 되면 대부분의 한성부 주민은 계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한성부 주민들을 각계(各契) 방민(坊民)으로 불렀다. 계는 한성부의 최말단 행정 기구로서, 향촌사회의 동계와 마찬가지로 주민의 윤리와 풍속 교화를 담당하는 자치적인 기구였으나, 본질적으로는 방역(坊役)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기능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의 결성에서 주민 집단의 동질성 이라는 요소가 약화되고 주거 지역의 동일성이 계를 유지·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변화하였다. 계가 방역의 수행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므로 주민의 증가와 감소에 따라 계가 창설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였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도성 밖의 성저십리를 정하고 있다. 성저십리에 속하였던 현재의 안암동 지역이 언제 동부 숭신방에 속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1751년(영조 27)에 반포된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稐音)》의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오늘날 도봉구의 우이천과 성동구의 중랑천 서쪽 지역이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방·계명이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동부 숭신방(성외) 지역 가운데 안암계(安岩契)라는 명칭이 보인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도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안암동계(安岩洞契)라는 명칭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18세기 후반 안암동 지역은 한 성부의 성외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67년(고종 4)에 반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의 한성부조에는 안암동계가 동부 숭신방에 포함되어 있다. 뒤이어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시기 한성부의 5부(部)를 5서(署)로 변경할 때에는 방 아래에 계(契)를 확장하고 각 마을을 계의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종래 숭신방에 있던 12계를 동문외계(東門外契)와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의 2계로 대별하여 개편하고 모든 마을을 이 두 개의 계에 속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안암동 명칭은 보이지 않고 지금 안암동 내 에 있는 원리(園里)·궁리(宮里)·상리(上里)·중리(中里) 등의 마을이 동문외계에 속하여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안암동 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울 동부의 도성 외곽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제훈, 서홍석, 이지훈, 조용철, 황선익, 2018, 서울 서울 동(洞)의 역사 성북구 제3권(보문동·안암동·종암동), 134-137쪽
  •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서, 동문외계의 홍수동*복차교*남교*대정동*편교*장평리*미전동*장거리*영미동*정자동*대종암*신리*신설동*원리*궁리*상리*중리*우산각리*소종암*돈암리*삼선평, 동소문외계의 성북동*소정릉*손가정*청수동*미아리*번리*대수유리*가오리*우이리 등이 있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숭인동*창신동 각 일부와 신설동*안암동*종암동*돈암동*동소문동*동선동*미아동*정릉동*번동*수유동*우이동*성북동 각 일원에 해당한다.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지명사전, 항목: 숭신방(崇信坊)

기술통제

  • 작성자: 장지희
  • 작성일: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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