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광화문 근처 내수동이지만 네 살 때 미아리로 이사한 뒤로는 미아리 일대가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당시 미아리는 온통 산과 논밭, 개울 뿐이었고 인가라 고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유치원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덕성유치원까지 가야했고 국민학교는 돈암동까지 가야 했다. 학교가 멀어서 애를 먹긴 했지만 여름에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개울에선 붕어와 가재를 잡는 재미가 그런 불편을 보상해 주었다. 겨울엔 꽁꽁 얼어붙은 앞 개울에서 온종일 팽이를 돌리고 썰매를 타는 것이 일과였다. 내 어린시절은 그야말로 자연과 하나된 생활이었다. 경성부(지금의 시청)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그림에 굉장한 소질을 가진분이어서 내가자 는 모습을 주로 그려주시곤했는데 지금 보아도 보통 솜씨가 아닌 듯하다. 아버지는 또 집안에서 항상 노래하기를 좋아하셨는데 이태리 민요 「돌아오라 소렌토로」로부터 안기영의 「그리운 강남」, 고복수의 「고향설」, 홍난파의 「봉선화」등 못 부르시는 게 없었다. 나의 음악적 재질은 아버지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은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린 나이에도 음정과 박자를 맞추는데 취미와 소질을 발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교내 학예회의 합창단 모임에 응모했다가 「째지는 목소리」라고 보기좋게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땐 노래하는데 전혀 소질없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실망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변성이 되고 마침 교회를 나가시기 시작한 어미니를 따라 교회성가대에서 열심히 노래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곱고 예쁜 목소리」라고 칭찬해 주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선 것은 (경동)고등학교 3학년 때 교회의 부흥목사로 오신 김창일 목사님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음악하면 배고픈 직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사회통념이었지만 부모님도 반대하지는 않으셨고 나 또한 순전히 음악이 좋아서 택한 길이었다. 새벽마다 정릉뒷산의 약수를 마시고 소리를 질렀으며 밤이 되면 동네 골목길이나 뒷동산 오솔길을 발성연습장으로 삼곤 했다. 소리가 나는 모든 사물을 열심히 관찰하기도 했는데 사자가 가장 우렁찬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걸 배우겠다며 창경원 사자우리앞에서 하루 종일 사자가 울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고 복부의 힘을 기르기 위해 백근짜리 역기를 올려놓고 숨쉬는 연습을 한 적도 있었다. 날달걀을 먹으면 목소리가 좋아진다는 말에 매일 아침 날달걀 한 개씩만 먹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집안사정이 여의치못해 그 소원은 끝내 이루지못했다. 대학 1학년 때에는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하루 내내 연습을 하자면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하략)
경향신문 1993.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