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월
1917.08.01 - 2012.03.26
인물 개인 음악가
가수, 작사가이다. 본명은 박창오이다. 1939년 가수로 데뷔해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고 해방 이후에는 작사가 활동이 두드러졌다. 「잘있거라 항구야」(1940), 「불효자는 웁니다」(1940) 등을 불렀고, 「울고 넘는 박달재」(1950)와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 등을 작사하였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반야월이 6.25전쟁 당시 딸을 잃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음악과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에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돈암동
  •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3)
  •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1)
  •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2)
  •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4)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半夜月
  • 이명칭: 박창오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음악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반야월(半夜月) 1917-2012 가수ㆍ작사가 경남 마산 출생. 본명 박창오朴昌吾. 1939년 가수로 데뷔해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고 해방 이후에는 작사가로 활동이 두드러졌다. <잘있거라 항구야>(1940), <불효자는 웁니다>(1940) 등을 부르고 <울고 넘는 박달재>(1950)와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 등을 작사하였다.
  •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1956년 발표된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발표되자 마자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전쟁의 비극과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을 절절히 묘사한 가사는 가수 이해연의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왔다. 그런데 이 가사에는 작사가 반야월의 개인적인 사연이 반영되어 있다. 반야월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6.25가 터지자 나는 곧 T셔츠 바람으로 혼자서 고향 마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출발이 좀 늦었던 탓으로 산길만을 골라 내려갔지요. 미아리고개 너머, 지금은 미아동 쯤 되는 곳에서 살았었는데 집에 아내와 1남 2녀, 3남매를 남겨둔 채였습니다. 아내는 그 뒤 1.4 후퇴 때 처가가 있는 김천을 거쳐 마산으로 나를 찾아왔어요. 그런데 둘째 딸 수라가 죽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때 다섯 살 먹은 어린애였는데 난리통에 식량이 없어 밀기울밥을 먹고 지내던 끝에 영양부족으로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야월의 부인 윤경분은 수라의 시신을 미아리고개 근처 공동묘지에 묻고 피난을 나왔다. 1956년 10월, 반야월은 마산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부인과 함께 둘째 딸 수라가 묻힌 곳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딸에 대한 죄책감을 담아 노랫말을 지었고, 이렇듯 그가 말 그대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만든 노래가 바로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였다. 노래는 1절과 2절로 나뉘어져 있는데, 반야월 자신의 사연은 2절에 담겨있다. 1절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기 전 강제로 북송된 사람들의 사연이다. 그들이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북으로 끌려가던 길이 바로 미아리고개였던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63-65쪽
  • 반야월(1917~2012). 본명은 박창오(朴昌吾)이다. 가수로 활동할 때는 진방남(秦芳男)이라는 예명을 썼고 그밖에도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蒲),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허구(許久),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등의 여러 예명을 사용했다. 작사한 곡 중에 크게 히트한 곡으로는 〈울고 넘는 박달재〉(1948), 〈무너진 사랑탑〉(1958), 〈열아홉 순정〉(1957), 〈아빠의 청춘〉(1966), 〈소양강처녀〉(1969) 등이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66쪽
  • 정의 1917∼2012. 193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활동한 대중가요 작사가 겸 가수. 개설 1917년에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창오이다. 1939년에 진방남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해 가수 활동을 시작했고, 1942년에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작사 활동도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노래와 작사를 병행했고, 이후로는 주로 작사에 주력했다. 1950∼1960년대에 가장 대중적인 작사가로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고, 한국연예협회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 대중가요 관련 각종 단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활동사항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넉넉했으나 곧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1939년 태평레코드에서 주최한 콩쿠르에 당선되어 진방남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데뷔를 했고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마상일기」 등 인기곡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1942년부터는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작사 활동도 시작했는데, 직접 부른 「꽃마차」가 첫 번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이후에는 남대문악극단을 운영했고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가수로서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으나, 이후로는 작사 활동에 주력했다.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이사(1956년), 한국연예협회 창작분과 초대 위원장(1961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1964년) 등 다양한 단체 활동을 통해 대중가요계의 정체성 확립과 권익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1980년대까지도 현역 작사가로 많은 인기곡을 발표했고, 1990년대 이후 대중가요계의 대표적인 원로로 부각되었다. 2010년에는 1940년대 전반에 군국가요 관련 활동을 했음을 공식 사과하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타계 직전까지 자료 기증 협의 등 대외 활동을 하다가 2012년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대중이 보다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와 표현법으로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 활동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전쟁 이후 월북 작사가들의 작품이 금지 대상으로 떠오르자 추미림, 박남포 등의 필명으로 개사 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상훈과 추모 1991년에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 반야월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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