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룡
1896.10.28 - 1964.12.08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성북동에서 거주한 신문기자, 평론가, 저술가이자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독립운동가이다. 배성룡은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이론개발과 실천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에는 좌우연합을 통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매진하여 김규식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성부 성북정 176-4(현 성북로 40-1)에 거주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성북동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배성룡(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배성룡(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裵成龍
  • 이명칭: 배성용, 배수성(裵秀星), 성산학인(星山學人), 성산생(星山生), 성산인(星山人), 별뫼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5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76-4 (성북로 40-1)
  • 비고: 경성부 성북정 176-4번지

근거자료 원문

  • ·성북정 176-4번지 ·1924년 화요회,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참여 ·1928년 체포되어 징역 1년 복역 ·해방 후 1월 이극로 권오익과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하여 비상국민회의와 민전의 통합을 위해 활동 ·1946년 7월 좌우합작촉진회 결성 ·1947년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활동 ·1948년 김구의 남북협상지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5쪽
  • 배성룡의 좌우이념대립 극복을 위한 노력 (성북동 176-4 거주) ·배성룡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민족운동이 이념 대립으로 분열되었을 때 이에 매몰되지 않고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이론개발과 실천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비판적 지식인 ·해방 후 배성룡은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각당통일기성회, 좌우합작촉성회, 민족자주연맹, 통일독립촉진회 등에 참여하여 좌우연합을 통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매진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참여하고, 민족자주연맹 주석 김규식의 특사로 권태양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협상을 위한 교섭을 담당 ·남북협상 후 그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초래한 선거라는 이유로 남한의 단독선거에도 반대 ·이후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 ·신문기자, 평론가, 저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9권의 저서(미발표 초고본 1권 포함)와 250여 편에 달하는 글(논설, 설문, 좌담, 기타)을 남긴 당대 최고의 이론가 ·‘신형민주주의론’ : 정치적으로는 일당 독재를 거부하고 다당제에 바탕을 둔 의회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사회주의의 평등성을 조화를 지향 → 급격한 사회혁명의 방법이 아니라 점진적인 방법으로 사회 개혁을 전망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성을 지닌 정치이념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7쪽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사회주의 계열 이름: 배성용 주소(당시): 경성부 성북정 176-4번지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6-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7쪽
  • 경북 성주 출신으로 성북정 176번지 4호에 거주하였다. 1923년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화요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박일병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제1야체이카 정우회 프랙션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추진한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에 관련되어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았다. 1930년대 경제 평론가로 활동하였고, 1934년 의열단의 국내 연락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6년 이후 성북동 자택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고, 1947년 10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활동을 하였다.
  • 본적: 경북 성주 주소: 경성부 성북정 176-4번지 계열과 단체: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활동내용> 1924년 화요회.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1928년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에는 이극로, 권오익과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하여 비상국민회의와 민전의 통합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촉진회 결성하였고, 1947년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활동을 하였다. 1948년 김구의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참고문헌> 被疑者 裵成龍 訊問調書
  • ○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성북동에 거주했던 배성룡 또한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24년 사회주의단체 화요회와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2쪽
  • ○ 장건상과 배성룡, 이념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됐지만 미국은 강경한 자세로 38도선 이남에서는 어떤 행정조직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부정했기 때문에 충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에게 정부의 이름으로 오거나 주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안된다고 못 박습니다. 나라는 어수선하고 1945년 미국, 영국, 소련이 참여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 5년간 신탁통치 실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가 합의됩니다. 신탁통치는 제2의 식민화나 다름없었기에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은 극심하게 대립합니다. 이들은 1946년 3월 1일에 거행된 3·1운동 기념식도 따로 거행합니다. 그러나 “남한만이라도 먼저 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을 격퇴하자”는 이승만의 발언에 위기의식을 느낀 지식인들은 조국 분단을 우려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합니다. 좌익에는 여운형이, 우익에는 김규식이 운동을 이끕니다. 앞서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배성룡도 좌우합작 촉진회를 결성해 활동한 바 있습니다. 배성룡의 활동에서 괄목할만한 점은 그가 사회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좌우이념대립 극복을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이념 대립으로 인해 숱한 분열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그는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이론 개발과 실천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5-126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46년-배성룡 좌우합작운동 1948년-조소앙, 배성룡, 김의한 등 남북협상에 참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쪽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배성룡 이념을 극복하고 하나로 뭉친 조국을 꿈꾸다 1896~1964 / 애족장 / 성북동 176-4호 거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근무한 언론인으로서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26년에 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렀고 1934년에는 의열단의 국내 연락책으로도 활동했습니다. 해방 이후 좌우합작촉성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으며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제2차 특사로 남북협상에 참여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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