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
1899.03.19 - 1976.02.17
인물 개인 화가
동양화가이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등과 동연사(同硏社)라는 서화단체를 조직하고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 하였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새로운 동양화풍을 익혔다. 1937년부터는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직접 사생하면서 새로운 화풍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 새로 터를 잡았던 ㄷ자형 돈암동 한옥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이름 짓고 한편에 위치한 화실에서 고유 기법인 ‘소정 양식’을 완성했다. 말년에는 정릉골짜기에 있는 대성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1975년 회고전을 개최했고, 이듬해 돈암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돈암동
  • 대성사 현판
  • 대성사 포대화상(布袋和尚)
  • 대성사 방풍림
  • 대성사 삼층석탑
  • 대성사 대웅전 내부(3)
  • 대성사 대웅전 내부(2)
  • 대성사 대웅전 내부(1)
  • 대성사 대웅전(3)
  • 대성사 대웅전(2)
  • 대성사 대웅전(1)
  • 대성사 풍경(風磬)
  • 대성사 마당 전경
  • 대성사 석등
  • 대성사 전경
  • 대성사 정문
  • 대성사 석불 입상
  • 변관식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卞寬植
  • 이명칭: 소정(小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11-25 (현 동선동3가 76번지)

근거자료 원문

  • 2. 변관식(1899~1976)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호는 소정(小亭).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전통을 계승하면서 ‘소정양식’을 완성했다. 한의사 정연(晶淵)과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趙錫晋)의 딸인 함안 조씨(咸安趙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승업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조석진을 외조부로 둔 덕분에 11살 되던 1910년 서울에 올라와 외조부가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인생이 시작됐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등과 동연사(同硏社)라는 서화단체를 조직하고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 하였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새로운 동양화풍에 대해 익혔고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의 간사 일을 맡아보았다. 1937년부터는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직접 사생하면서 새로운 화풍을 모색했다. 1953년 정부 위탁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외금강 옥류천>을 제작하여 보냈다.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관여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강직한 성격 탓에 1957년 이를 박차고 떠났으며, 나머지 여생의 대부분을 화가로서 작품활동에만 몰두했다. 1954년 새로 터를 잡았던 ㄷ자형 돈암동 한옥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이름짓고 한편에 위치한 화실에서 ‘소정양식’을 완성했다. 갈필(渴筆)의 적묵법과 파선법 위에 갈색으로 응결시켜 짙고 거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소정의 화풍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변천하였다. 1917~1936년까지의 초기는 주로 서화미술원이나 일본 유학 등을 통하여 그림 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화풍 형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던 시기였다.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과 서구적 기법이 가미된 일본의 신남화풍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이미 거친 화면 처리와 시선의 다각적인 전개 등으로 그의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7년 서울을 떠나 전국을 여행하면서 실경사생을 통하여 자신의 화풍을 다졌던 중기는, 그가 해방이후 참여하였던 국전을 떠나기 직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누각정경도(樓閣情景圖)」(1939년)와 「산수춘경도(山水春景圖)」(1944년), 「해금강삼선암추색도(海金剛三仙巖秋色圖)」(1955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향토색 짙은 실경을 소재로 적묵법과 파선법이 밀도 있게 다루어졌다. 1957년부터 그가 타계하기까지의 후기는, 적묵법과 파선법과 더불어 분방한 호초점(胡椒點)19)을 즐겨 다루었던 원숙기이다. 특히 구도에 있어서 황금 분할식 공간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물의 일부분을 대담하게 부각시키는 등 다양함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농가도」(1957년), 동아일보사 소장의 「무창춘색도(武昌春色圖)」, 「외금강삼선암도(外金剛三仙巖圖)」(1970년) 등이 있다. 말년에는 정릉골짜기에 있는 대성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1975년 회고전을 개최했고, 이듬해 돈암동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1-192쪽
  •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전통을 계승하면서 ‘소정양식’을 완성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인 조석진의 외손자로 서화미술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상범, 노수현 등과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인 ‘동연사’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이후 금강산을 유랑하고 말년까지 오대산, 설악산 등지로 다니며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1953년에는 정부의 위탁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대관식에 〈외금강 옥류천〉을 제작하여 보냈다. 1954년 돈암동 한옥에 자리를 잡고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짓는다. ㄷ자형의 한옥에 화실을 두고 이곳에서 소정양식을 완성한다. 말년에는 정릉골짜기에 있는 대성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1975년 회고전을 개최하고, 이듬해 돈암동 집에서 생을 마감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6쪽
  • 한국산수화 4대가로 꼽히는 소정 변관식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전통을 계승하면서 독창적으로 재창조한 화가이다. 1899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난 변관식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자 남종화의 대가인 소림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외가가 있던 서울 송동(명륜동과 혜화동에 걸쳐 있던 동네)으로 상경하여 소림 문하생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화가의 삶을 대물리고 싶지 않았던 소림은 이를 완강히 반대했지만 결국 서화미술원의 문하생으로 변관식을 받아들여 한국화를 가르쳤다. 그는 비슷한 또래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畵風을 만들고자 하였다.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묵로 이용우와 1923년의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인 동연사同硯社를 만든 것도 평범한 자연 풍경에 관심을 기울이며 새로운 한국화를 그려보려는 노력이었다. 모임은 다음해 해체되었지만 전통을 새롭게 이으려는 노력과 교류는 계속되었다. 1925년 일본 동경 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유학하여 배움의 폭을 넓혔고, 귀국 전후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개인전도 열며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1938년부터 8여 년 간 금강산을 유랑하며 산세와 바위, 나무의 형태들을 관찰하고 밑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나라 산하를 느꼈고, 자신의 색깔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조선 후기 직접 눈으로 담은 풍경을 화폭에 그려낸 겸재 정선, 표암 강세황도 금강산의 실경을 즐겨 그렸다. 금강산을 보지 못한 사람도 그림만으로 금강산에 가본 기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표암처럼 변관식도 우리나라 산수의 기운을 사실적이고 생동적으로 묘사하였다. 1950년대부터 금강산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려 1953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외금강 옥류천> 작품을 그려 보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1954년 돈암동 산11-25의 한옥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49, 이하 국전)의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로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중 파벌과 비리로 공정성을 잃은 국전에 반기를 든다. 1955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에 ‘국전을 앞두고 편파적인 심위구성, 그 비공정에서 파생될 화단의 암癌’이란 논단으로 국전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계속해서 문제를 지적하였다. 변관식이 1957년 10월 21일자 연합신문에 기고한 ‘공정성 잃은 심사’라는 글을 계기로 불만의 목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오며 반反국전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연과 학연을 심사에 반영하는 잘못된 심사는 쉽게 없어지지 않아, 남종산수화풍을 제외한 작품들은 심사에서 배제되었다. 1967년에는 천경자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채색계열 작품을 그리는 화가들이 대거 탈락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젊은 작가 20여 명은 ‘제16회 국전 동양화부 낙선 작품전’을 덕수궁 중화문 옆 건물에서 열어 국전의 편파적인 심사에 반발하였다. 변관식은 전시 개막식에 찾아가 젊은 작가들을 격려하였다. 기득권의 잘못된 행태에 등을 돌려 미술계에서 활동을 접고 작품활동에 힘을 쏟으며, 한편으로는 서라벌예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변관식은 지난 그림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밖으로 나가 풍경을 찾고, 스케치로 담는 사행(스케치를 위한 여행)을 강조하였다. 남강 김원, 출정 유명렬, 윤재 노영준 같은 제자들은 금강산의 만물상 풍경이나 한국의 명산과 농촌풍경 등의 실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통해 소정의 회화계보를 이어갔다.
  • 1954년 돈암동 산11-25의 한옥으로 거처를 옮겼다. 작은‘ㄷ’자형 한옥에 화실을 두고 당호는 ‘돈암산방’이라 하였다. 붓 한 자루 살 돈도 없으면서 그림으로 술값을 대신할 정도로 술과 풍류를 즐겼다. 돈암동 곽서방네, 미아리고개 넘어 길음정은 친구들과 자주 들리던 술국집이었다. 동소문밖 언덕배기 듬성 듬성보이는 고옥들 사이에 자리 잡은 칠순의 소정 변관식 화백의 남향받이 화실은 그의 작품세계처럼 소박하고 온아했다. 화실이라야 서민풍의 십구간 한옥의 건넌방이지만 화필 오십여 년의 체취가 배어선지 그윽함이 풍긴다. <봄을 바라보는 아틀리에-소정화실의 변관식> 동아일보, 1972.01.11 1960년을 전후하여 독창적인 구도와 묵법으로 표현한 ‘소정양식’이 완성되었다. 붓에 먹을 엷게 찍어 그림의 윤곽을 만든 후 먹을 칠하는 적묵법積墨法과 먹을 튀기듯이 찍어 선을 파괴하듯 리듬을 주는 파선법破線法등 자기만의 화풍을 창조하였다. 스승 조석진을 넘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소정의 소는 내 외조부면서 나의 은사이신 고 소림 선생의 아호 중에서 ‘소’자를 적용했고, 또 ‘정’자로 말하면 내 시조의 아호가 ‘춘정’이셨으므로 거기서 ‘정’자를 인용한 것이 즉 ‘소정’이 된 유래다. … 내 호를 가지고 억지로 허장성세 할 양이면, ‘대’자를 싫다하고 ‘소’자를 골라잡았으니, 겸허하고 온공한 미덕이 그 가운데 꾸려져 있다 할 것이며, 또 ‘정’자는‘고산반석高山磐石기상 정정其上亭亭’이란 옛 글과 같이,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소정’이란 내 호가 어찌 아주 의미가 없고 특징도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변관식, <소정의 변辯> 동아일보, 1957.04.10 변관식은 말년까지도 단양 8경과 오대산, 설악산 등으로 끊임없이 스케치 여행을 다녔다. 그곳의 지형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가 되어서야 작품을 구상하여 한 점, 한 점에 혼을 쏟았다.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위해 정릉골짜기 대성사에 들어가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은 그림 속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걸어가는 노인을 가리키며“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쓸쓸히 웃었다.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야”고 하던 변관식의 말처럼 그의 작품세계는 타계 이후에 더욱 인정받았고, ‘한국의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토속적인 작품을 그리는 한국산수화 4대가’로 높이 평가받았다.
  • 변관식(卞寬植) 1899-1976 소정(小亭) 화가. 황해도 옹진 출생.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에게서 서화를 배우고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1년 서화협회 회원, 1922년 동연사에서 활동하며 전통적인 남화계에 독특한 적묵법積墨法을 구사하였다. 대표작으로 <성북정협>(1928), <산수춘경도>(1944), <해금강 삼선암 추색도>(1955)가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6

관련 마을아카이브

  • 이야깃거리
    장승업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
  • 대성사
    이야깃거리
    대성사
    분류: 장소
    시기: 미상
  • 돈암산방
    이야깃거리
    돈암산방
    분류: 장소
    시기: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