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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이곳을 다니는 동안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재개발한다고 말이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 상황이라며 한동안 울분을 토해 내셨다. 재개발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다. 죽기 전에는 새집에 살아보고 싶으시다고 하신다. 한동안 서서 하소연을 들어 드렸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2. 10. 25. 정릉동 '정릉골 재개발 지역' 촬영) / 주민기록단 구정숙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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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속도를 내어 진척이 되어가는 개발 과정과는 달리 밭에서 만난 주민들의 말씀으로는 재개발 된다는 소식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듯했다. 현재 대부분 외지에서 땅을 매입한 사람들이 많아 공가가 많고, 땅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그나마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재개발로 인해 길이 생기고 보도블럭이 깔리면 그나마 경계없이 작은 땅을 가지고 살아가던 주민들은 거의 터전을 잃게 된다고 한다. 이주비가 나온다해도 당장 집을 살 돈도 없고 거의 내쫓기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옆에 계시던 아저씨 한분이 50년간 택시운전을 하면서 이렇게 정감이 가는 마을은 처음이라고 하시면서 재개발이 되면 이런곳을 또 어디서 보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의 말씀을 뒤로 한 채 정릉골을 내려왔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2. 09. 29. 정릉동 '정릉골 골목길' 촬영) / 주민기록단 정봉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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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채소밭 앞에 ‘무공해 상추 팝니다’란 미니 현수막이 세워져 있다. 밭에는 상추, 고추, 부추, 줄기가 무성한 고구마, 호박, 옥수수 등 여러 가지 작물이 자라고 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채소밭 옆의 집 대문을 열고 한 할머니가 나왔다. 상추 사러 왔냐고 묻길래 그렇다며 말을 붙였다.
1975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혼자 살고 있는 김문자(82세) 할머니는 아들은 없고 딸만 넷인데, 각각 잠실, 하남, 대전,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으며 7명의 손주가 있다고 했다. 오늘이 주일이라 오전에 미아동 순복음교회에 예배를 다녀왔는데 아직 이사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마음이 심란하다고 했다.
대문 앞에 큰 무궁화 나무가 있어서 동네에서는 자기를 ‘무궁화 할머니’라고 부른다고 하며 밝게 웃었다. 상추를 사겠다고 했더니 집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큰 플라스틱 그릇을 들고 나와 밭으로 갔다.
밭에서 직접 따주는 것이라 싱싱했다. 할머니는 가게에서 흔히 보는 꽃상추에 로메인상추를 덤으로 주면서 풋고추와 가지 고추(가지색을 닮았다)도 따주었다. 또 아주 귀하고 맛이 다른 간월도 마늘이라며 두 통을 주었다. 부엌에 두고 자기만 먹는다며 소중한 보물인 듯 내 손에 쥐어주었다. 허름한 부엌 외벽에 걸린 커다란 원형 시계는 지친 듯 5시 35분에 멈춰선 채 오는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의 마당에는 토마토 밭이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토마토를 맘대로 따먹으라고 해서 몇 개 따먹고 또 서너 개는 가지고 왔다.
할머니는 상추를 담은 비닐봉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예전에는 집 앞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텃밭 작물도 많이 사갔는데 지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집에 와서 비닐봉지를 펼쳐보니 유기농 상추 5천 원어치에 덤으로 받은 고추며 토마토며 마늘까지 푸짐했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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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마을버스가 다니는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주민을 만났다. 맨발로 걸으면 아프거나 위험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맨발로 4년을 걸었는데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투석환자라서 맨발 걷기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이름을 물었더니 내가 누구인지 동네 사람들은 다 안다며 67세라고 나이만 말해주었다. 그녀는 정릉골 동네 길을 걸으며 건강이 좋아져서 이 마을이 너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가던 길을 멈추고 환히 웃으며 모델이 되어주었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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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간신히 천막집을 면한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집 앞에 남, 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집 처마 밑에는 ‘쌍둥이 슈퍼’라는 작고 낡은 간판이 걸렸다. 두 사람에게 여기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들은 슈퍼 주인 할머니 집에 세 들어 사는 부부라고 했다. 이사 온 지 4개월 되었다는 정덕영(55세), 송은미(45세) 부부는 아주 쾌활하고 친절했다. 남편은 40여 년 전에 정릉골에 살다 떠났었는데 다시 들어왔다고 했다. 재개발 지역이라는 걸 알고 왔지만 이렇게 빨리 나가야 하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40여 년 전부터 개발지역이 될 것이라는 말이 있던 터라 아직도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고 귓전으로 넘기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처지에 다른 곳으로 이주할 생각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들 부부는 대화 응대도 잘 해주고 흔쾌히 사진 촬영에도 응해주었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부부였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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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성화사라는 큰 절이 있다. 특이하게도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일반적인 절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절 앞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06번 마을버스가 섰다. 장을 본 물건을 양손에 잔뜩 든 아주머니가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에게 재개발이 된다고 해서 둘러보고 있는데 여기서 얼마나 살았냐고 물었다. 60중반의 아주머니는 이 동네에서 14년 살았으며 이주를 해야 하는데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더 들어가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곳이 ‘넓은마당’ 정류장이며 다음이 종점인데 거기까지 가나 자기 집주변이나 집들이 거의 다 비었으니 둘러볼 것도 없을 거라며 찻길을 따라 내려가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러고 나서 총총히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고단한 삶을 품고 살아가는 애잔함이 느껴졌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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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한 할머니가 캐리어에 뭔가 잔뜩 싣고 언덕길을 내려온다. 75세의 할머니는 40년간 정릉골 언덕 위에서 살아왔다고 했다. 집에서는 빨래하기가 힘들어서 개천 건너편 아파트 옆의 빨래방으로 빨래하러 간다고 했다. 빨리 걷지 못해 언덕을 내려오는 데 1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했다. ‘박경리 가옥’ 앞을 지날 때 할머니가 박경리 집을 보러 왔냐며 물었다. 그래서 그 집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러자 여기 내려오면 그 집을 묻는 사람이 많다며 정확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러고는 다들 옆의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집을 박경리 집으로 잘못 알고 간다며 답답해했다. 자기는 재개발 그런 게 뭔지 모르며 이사 나가라고 해도 이곳에서 박경리 집을 가르쳐주며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할머니의 진심이 담긴 말에 감동을 느꼈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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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온통 주변이 폐허인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빨래를 가지런히 널어놓은 집이 나타났다. 너무 뜻밖이어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빨랫줄에 널린 하얀 천과 옷가지들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세탁기에 빨래를 해서 실내에서 말리는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거의 볼 수 없게 된 옛 모습이다.
오지와 다름없는 정릉골 폐허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빨래 주인인 60대 초반의 아주머니는 세입자인데 30여 년 전부터 그 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이사 준비는 되었냐고 묻자 이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혹시나 싶어 가까운 곳에 셋방을 구하려고 알아봤으나 집이 없어 아예 포기했다고 한다.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했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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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
김길림(76세) 할머니 집은 벧엘교회 뒤쪽 언덕바지 중턱에 있었다. 주변에는 비교적 반듯하고 깨끗한 주택이 여러 채 보였다. 지인의 소개로 전화를 해서 만난 그녀는 부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종로구 숭인동에 살면서 정릉골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을 듣고 38년 전인 86년에 투자 목적으로 이 집을 사서 세를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재개발 일정이 자꾸 늦어지자 40여 년 살아온 숭인동 집은 세를 놓고 13년 전에 이 집으로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공기도 좋고 집 앞의 텃밭에 채소도 심어 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말까지는 불가피하게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정릉시장 근처의 빌라 지하방을 계약했다고 한다. 숭인동 집은 세를 주고 있어서 다시 들어가기도 곤란한 상황이지만 그곳도 재개발 얘기가 나오는 터라 아예 가까운 곳에 이사 갈 집을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지난날 창신동에서 ‘큰대문’이란 음식점을 했고, 수유리에 모텔을 운영하기도 하고 제기동시장 옆에서는 단란주점도 열었던 사업가였다. 그래서인지 창신동 여성회장도 맡았다는 그녀는 아주 활달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녀와의 얘기가 끝나자 남편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 한 병을 꺼내주었다. 그들 부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집을 나왔다.
주민기록단 활동보고서(2024. 07. 18. 정릉골 재개발(2) - 정릉골 사람들) / 주민기록단 남명희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