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옥
1929.02.07 - 2020.11.29
인물 개인 화가
동양화가이다.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제1회로 졸업한 그는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1960년 ‘묵림회(墨林會)’를 창립하였고 전통수묵 기법을 현대회화에 도입해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73년에는 소나무 숲이었던 성북동 언덕에 창덕궁 연경당을 본 뜬 열네 칸 사랑채를 지었다. 뒤편에는 화실을 따로 두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서예 필법으로 그린 <인간시리즈>, <군상>, <춤추는 사람들> 등 작품을 발표했다. 서세옥은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78년 성북동에 사는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성북장학회를 조직하여 작품을 팔아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또, 2009년 성북구립미술관 건립에 힘을 보태면서 명예관장으로 위촉되었고, 그의 사후 유족들은 서세옥의 작품 2,300점과 미술 컬렉션 990여 점을 성북구에 기증하였다.
성북동
  • 서세옥_성북구청장과의 간담회
  • 서세옥 가옥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徐世鈺
  • 이명칭: 산정(山丁)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8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10 (성북로28가길 7)
  • 비고: 서세옥 가옥

근거자료 원문

  • 화면에 칼로 베어낸 생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생선의 살코기 무늬, 육질이 붓을 몇 번 안 댔는데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됐는지 살아 있는 생선으로 착각할 정도였다는 거예요. 그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위대한 화가가 있었구나.’ 감동하셨답니다. 또 붓이 한번 지나가면서 나뭇가지의 볼륨, 입체감이랄까, 농담에 의해서 나뭇가지가 힘차게 올라가면서 끝에 꽃과 과일이 달린 표현들을 보고 굉장한 경지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또 그릇의 원근법적 표현, 붓 한 번 찍어서 빛을 받는 부분과 그늘을 받는 부분을 농담으로 표현한 이파리 부분 등, 그 그림에 작가가 살아 움직이고,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 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했다고 합니다. 이 때 오원 장승업이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우리나라 그림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답니다. -서세옥, 「나의 스승 근원 김용준을 추억하며」중에서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4쪽
  • 산정 서세옥의 회고에 따르면 수화는 항시 짐 속에 이 작품을 싸서 갖고 다녔고 끝까지 애장하였다고 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9-220쪽
  • 성북동 산허리에 자리한 무송재(撫松齋).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과 자연을 담은 이곳은 세계적인 작가이며 한국화단을 이끈 산정 서세옥 화백의 집이자, 그 예술의 산실이다. 집안에는 옛책과 수석,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 산정은 애국지사요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서장환 선생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역사의식이 뚜렷하고 독서에 심취하였다. 일본 경찰이 수시로 집에 들이닥쳐 역사서와 선조들의 문집을 압수해갔다. 마음 편히 책을 읽기 어려워 밤낮을 바꿔 한밤중에 서고에 숨어 책을 읽곤 하였다. 성장기에 읽은 동서 전적들은 산정의 사상을 이루는 자양분이 되었다.
  • 해방 후 1세대 작가로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제1회로 졸업한 산정은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1946년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미술학과는 김용준을 중심으로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양식의 동양화풍을 정립하였다. 산정은 작품활동 초기부터 추상성과 단순성을 바탕으로 현대적 동양화를 개척했다. 재학시절 해마다 개최한 대학미전에서 연속 최고상을 차지하였으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최고상을 수상, 잇따라 상을 수상하며 당시 가장 뛰어난 신인 작가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화가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국방부 종군화가단이 발족되고, 종군화가들은 대구와 부산, 서울로 옮겨 다니며 전쟁의 참상과 현장을 그렸다. 산정은 60대 대 선배들로 구성된 화가단에 젊은 작가로 참여하게 된다. 1954년 대 후반부터는 <점의 변주>·<선의 변주> 등 점과 선의 파격적인 수묵 추상작업으로 한국현대미술에 연속하여 새바람을 일으켰다. 1960년 산정은 그의 지도를 받은 졸업생들을 모아 묵림회(墨林會)를 창립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서양화와 동양화를 나누기보다 세계적인 새로운 조형질서를 제시하여 새 시대의 언어로서 회화세계를 정립하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 1973년, 산정은 소나무 숲이었던 성북동 언덕에 창덕궁 연경당에서 본 떠 스물 다섯 평짜리 열네 칸집 사랑채를 짓는다. 뜰 앞에는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손으로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무송재'는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살고자 하는 뜻이 깃든 집이다. 온통 소나무 숲이었던 이곳에 집을 지으면서 땅과 나무를 일부러 골라 없애거나,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지 않았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집안의 옛 목가구들이 소박하고 단아한 멋을 더한다. 앞뒤 마당에는 진달래와 산수유, 매화나무가, 그리고 노송들이 집을 감싸고 있고, 뒷마당에는 대나무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한국의 전통과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무송재에는 세계 각국의 미술전문인사, 애호가들의 탐방이 이어진다. 무송재 마당 곳곳에는 산정이 모아온 특별한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수석과 석물들이 있다. 근원 선생이 살던 성북동 집 '노시산방'에 주인을 잃고 버려졌던 수석을 비롯하여 성수침(成守琛)의 청송당(聽松堂) 앞뜰에 놓였던 수석,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료들이 고려 궁터에서 서울 관사로 옮겨 놓았던 수석과 석대 한 쌍,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 불상 조각 등 다양하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고, 선조와 스승을 찾아 배우고, 보존하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산정이 중요시하는 가치이다. 영운 김용진, 근원 김용준, 소전 손재형 등 당대 거목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그분들의 정신과 자취를 남기려는 노력을 하였다.
  • 연보 1929년 대구 출생 1950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부 제1회 졸업, 1998년 미국 리스디대학 명예미술학박사 경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한중미술협회 회장, 서울대학교 교수·학장·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성북구립미술관 명예관장 수상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무총리상(1949), 제1회 국전 초대작가상(1961), 제3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서울시문화상, 일민미술상, 의재미술상, 자랑스러운 미술인상, 한국현대미술거장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 전시 한중국작가와 교류전(1989), 상파울로비엔날레(1963), 깐느국제회화제, 현대동양화초대전, 한국현대미술파리전, 아시안퍼시픽미술관 '서세옥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세옥 회고전'(2006), 미국 휴스톤 국립미술관 '서세옥 회고전'(2007~8), 일본 동경 에르메스미술관 특별전(2007~8) 등 작품소장 프랑스 문화부(프랑스), 후쿠오카미술관(일본), 대영박물관(영국), 휴스턴미술관, 아시아퍼시픽미술관, 리스디미술관, 바록카래지미술관, 카운티미술관(미국), 로열온타리오박물관(캐나다) 등
  • 경북 대구 출생.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이다. 1950년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제1회로 졸업한 이후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1960년 ‘묵림회墨林會’를 창립, 8회의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통수묵 기법을 현대회화에 도입해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73년에는 소나무 숲이었던 성북동 언덕에 창덕궁 연경당을 본 뜬 열네 칸 사랑채를 지었다. 뒤편에는 화실을 따로 두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서예 필법으로 그린 <인간시리즈>, <군상>, <춤추는 사람들> 등 작품을 발표했다. 2010년 성북구에서 설립한 성북구립미술관의 명예관장으로 위촉되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0쪽
  • · 한국화가 서세옥의 집 대자연의 푸름과 싱그러움을 대할 기회가 늘상 부족한 현대 생활에서 정원이나 실내에서 곁에 두고 즐기는 꽃 한송이,나무 한그루가 삶의 청량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손길로 화초를 가꾸고 이를 완상(玩賞)하는 각계 인사들의 화초 가꾸기에 얽힌 이야기를 시리즈로 엮는다. 『서울에서 대나무를 기른다는 얘기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30여년 전부터 마당에 대나무를 심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비로소 6~7년전에야 그 비법을 알아냈습니다. 요즘은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 가까운 친구나 제자들에게 틈만 나면 대나무 기르는 법을 전해 이제는 대나무를 키우는 집이 꽤 늘었습니다.』 한국화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66)서울대 명예교수. 徐교수는 성북동 자택의 잔설(殘雪)이 흩어진 뜰에서 의연한 푸름을 과시하는 충절과 고고(孤高)함의 상징 대나무와 벗하는 감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거리에 나가면 부딪치는게 사람이지만 가까이 하고 존경할만한 대상은 드물잖습니까. 비록 대나무는 일개 식물이지만, 눈앞의 잇속이나 필요에 따라 움직이기 일쑤인 현대인들에게 지조와 강직을 말없이 훈도합니다.』 徐교수가 20여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한 대나무 기르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향일다습(向日多濕),이 네 글자로 요약됩니다. 추운 게 문제가 아니라 햇볕만 잘 들고 물만 충분히 주면 그걸로 끝입니다. 서울에서 대나무가 안 되는 이유는 땅에 모래 성분이 많아 비가 와도 곧장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대나무 뿌리는 5~10㎝ 정도 얕은 땅속에서 옆으로 뻗어나가는 속성상 수분이 부족하기 십상이며, 특히 겨울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겨울철에는 20일 가량에 한번씩 물을 충분히 준 후 뿌리 근처에 짚이나 왕겨를 덮어두면 수분증발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소개한다. (하략) 『중앙일보』 1995. 1. 2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4쪽
  • 해방이 되자 미술계의 제1과제는 ‘왜색미술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동양화, 즉 한국화 분야가 그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시급하고 절실했다. 일제강점기 36년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일본화 특유의 화풍이 동양화에서 광범위하게 침투되고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동양화풍의 모색은 몇 년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정전이후 이러한 이슈가 다시 제기되자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필선 위주의 수묵 담채 방법이 김용준, 장우성 등에 의해 추진되었고 해방후 1세대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다. 서세옥 박노수 장운상 권영우 등이 대표적 1세대 작가들로서, 신문인화풍의 필선과 담채로 현실적 소재를 담은 새로운 화풍을 모색해갔다. 대학졸업 전인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등단한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한국 화단을 이끌어온 그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전통 화단에서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 수묵추상의 화풍을 이루어냈다”고 평하고 있다. 한학자이자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민족의식 깃든 문인화가로서의 자질을 갖추었고 대학스승이었던 근원 김용준을 통해서 묵법 중심의 간결한 선묘와 담채에 의한 담백한 공간 처리를 중시하게 되었다. 진채를 사용한 일본화가 선묘를 단순한 윤곽선 정도로 격하시킨 것이라면, 김용준으로부터 서세옥에게로 이어진 조선 고유의 문인화풍의 선묘는 그 자체가 생동감 넘치는 입체적 요소로 작용한다. 1949년 국전 창설 직후 대학 4학년의 신분으로 국무총리상을, 1954년 3회 국전에서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지만 한동안 국전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등한시되고 한동안 왜색 화풍이 국전에서 득세했기 때문이다. 1960년 산정을 비롯한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들이 조직한 ‘묵림회’의 전시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서양화단에서 뜨거운 추상표현이라는 앵포르맬에 자극을 받아 동양화에서도 추상표현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산정은 송영방, 정탁영, 신영상, 민경갑, 남궁훈 등과 함께 묵림회를 통해 동양화의 비구상이라는 아방가르드적 실험을 성공적으로 일궈나간다. 이들은 ‘전위적 청년들의 집결체’임을 주장하며 국전으로 대표되던 화단의 보수성에 항거했다. 이들의 작품활동은 서양화단에 비해 답보상태에 있던 동양화단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온다. 동양화의 추상이라는 새로운 작품세계 뿐 아니라 기법 면에서도 혁신적이었다. 석고를 바른 패널을 나이프로 긁어내거나, 솜방망이에 먹을 흡수시켜 헝겊에 두들기는 등의 새로운 시도들은 붓으로 그리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동양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산정은 묵선과 여백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형상 속 기운생동을 표현하는 ‘사람들’ 시리즈에 천착하고 있다. 1973년 소나무숲 우거진 성북동 언덕에 창덕궁 연경당을 본 뜬 14칸 사랑채를 지어 ‘무송재’, 즉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 이름 짓고 여러 가지 석물들을 모아두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산정 선생이 한 여름이면 찻잎을 연못 연꽃잎 속에 두어 밤새 향기를 스미게 해서 아침에 거두어 차를 만들어 내어주시곤 하는데, 그 향취가 가히 비할 데가 없다”며 “무송재의 고아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연꽃차를 마셔봐야 성북동의 진정한 예향을 맡았다 할 수 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여전히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며 동양화단의 큰 어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산정의 두 아들, 설치미술가 서도호와 건축가 서을호도 각자의 분야에서 부친의 예술혼을 잇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3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 서세옥 주소(현재) : 성북동 260-10 분야 : 미술(동양화) 비고 : 서세옥 가옥(무송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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